나의 낭만은 항로가 아닌 선로와 바퀴를 타고 흐른다.
이제 나는 기내에서 창문을 바라보지 않는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안전벨트를 착용 후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의 시간은 더는 낭만적이지 않다. 단지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어떻게 버틸지 고민하고, 무슨 영화와 드라마가 있는지 맞은편 좌석에 붙은 스크린을 연신 훑을 뿐이다. 벗은 신발을 최대한 구석에 욱여넣고, 항공사가 제공하는 얇디얇은 일회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다음 최적의 각도로 등받이에 등을 붙이자 댈러스발 비행기가 이륙한다. 내가 속했던 땅이 멀어지며 점차 귀가 먹먹해진다. 귀속의 공기가 빠져나오게 나는 침을 몇 번 삼킨다. 한국은 얼마나 추울까. 이번에 예약한 숙소는 어떠려나. 터뷸런스로 흔들리는 머리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나는 월세 아파트에 산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두 칸짜리 아파트엔 수영장도 있고, 피트니스 센터도 있고, 쓰레기통도 현관문 앞에 내놓기만 하면 발렛 업체가 알아서 처리해 주지만, 그 모든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 달에 200만 원 남짓의 고정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월세로만 200만 원이 든다니. 전세라는 선택권이 있는 한국인의 관점으로는 터무니없이 큰돈일 수 있지만, 미국 부동산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면 비싼 편은 아니다. 19평짜리 단칸방 월세가 500만 원에 호가하는 맨해튼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미국의 월세방을 뒤로하고 이제 나는 한국의 월세방을 전전한다. 지금은 인천이고 다음 달엔 마포구의 연남동, 마지막으로는 상수동이다. 하도 굴린 탓에 캐리어 바퀴는 불안하게 덜컹거리고, 꽉 찬 짐으로 지퍼는 터질락 말락 한다. 23kg짜리 캐리어 두 개와 배낭 하나에 삶을 싣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도는 기분이란 고국이 있고 내 가족이 있어도 어딘가 허하고 고될 수밖에 없다. 당장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뵐 엄두가 나지 않는 건 더는 본가에 내 방이 없어서도 있지만, 삶을 이고 나르느라 힘에 부친 내 모습을 투정이라 오해할까 싶어서다. 미국에서 잘 살지 못하는 거 아니냐며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서다. 1년 가까이 방치해 두었던 머리카락을 다듬고, 한국 스타일의 옷을 사 입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친구들에게 지난 삶을 브리핑 한 끝에 나는 부모를 대면할 자세를 갖춘다. 만연한 미소를 띠고 씩씩하게 우리 집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서울은 마치 흐르는 물 같다. 고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변해 내가 알던 곳이 미처 모르는 곳이 되곤 한다. 중랑천이 흐르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나는 그런 서울을 절반만 안다. '우리 **구를 서울처럼!'이라는 슬로건이 국회의원 후보자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서울 같지 않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덕에 '오. 한국의 수도에서 태어났군요.'라며 은근히 눈을 반짝이는 미국인들 앞에서 어쩐지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골 같은 도시에서 산 경험이 텍사스 시골과 한국 대도시를 넘나들며 살게 된 내게 어떤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적응해야 하는 것은 사람보다 차가 먼저인 관습이다. 미국 월세방이 있는 곳에선 신호 없는 횡단보도 앞에 사람이 서 있기만 해도 몇십 미터 전부터 차가 속도를 늦춘다. 길을 건너겠다고 애써 신호를 주지 않아도 보행자가 도로를 건널 수 있게 미리 배려해 준다. 픽업트럭이든, 일반 자가용이든 상관없이 적용되는 룰이다.
물론 미국의 모든 차주가 우리 동네 사람들만큼 관대한 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인 뉴욕 맨해튼에선 일말의 가차도 없다. 서울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낫지 않다. 노후한 도로에 비해 너무 번쩍거리고 너무 커다란 차들은 빨간불에 길을 건너려는 성질 급한 관광객에게 분노의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끼얹기도 한다. 유유자적 도보를 걷다 고양이만 한 쥐가 발 담갔을지 모를 구정물을 별안간 뒤집어쓰는 기분이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감상하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가던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화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대도시가 매력적인 건 밤이 밝아서다. 수많은 인파에 끼어 철저한 타인이 될 수 있어서다. 우리 동네는 이름부터 '칼리지 스테이션'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마치 촌락처럼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내 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그곳에선 익명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치다.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밤마실을 나가곤 했는데, 농구 경기가 열리곤 하는 아레나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저녁 예배가 있어서다. 밤공기를 쐬고자 신실해지기로 작정한 것이다. 커다란 경기장을 둥둥 울리는 베이스 소리와 현란한 레이저쇼를 듣고 보고 있으면 불손한 추억에 잠겨 기분이 좋아지기는 한다. 두 팔을 흔들며 찬양하는 젊은이의 뒤통수를 헤아리며 여기가 과연 청교도가 세운 나라로구나 싶다.
이제 나는 굳이 옆구리에 성경책을 끼지 않아도 밤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왔다. 점점 낡아 가는 캐리어를 들고 여러 계단과 문턱을 넘나들어야 하지만, 한국의 멋과 맛과 밤을 누릴 생각을 하면 기꺼이 감내할 만하다. 비행기에서 잃은 내 낭만은 이제 선로와 바퀴를 타고 이동한다. 스케줄을 따라 적재적소로 군중을 나르는 지하철과 버스와 그 방향을 함께 한다. 그 안에서 나는 철저한 타인이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지인이 된다. 여전히 내 친구라서 고마운 은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들고, 술잔을 부딪치며 끊임없이 대화의 물꼬를 트다 보면 어느새 막차 시간이 훌쩍 다가온다. 그럼 나는 다시 흐른다. 검은 머리 외국인도 아니고 누군가의 아내도 아닌, 평범한 한국인으로 자연스럽게 군중 속으로 섞여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살짝 출출해져 다코야키 가게에 들러 반죽이 동글동글 구워지길 기다리는데 도시의 가로등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비춘다. 별 대신 가로등이 빛나는 밤이다. 여기가 나의 맨해튼이다.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