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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Mar 02. 2023

시들어가는 바질을 키웁니다

굽은 허리로도 꿋꿋이 오늘을 살아내는 방법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작은 피트니스 센터가 있다. 미국의 유명 체인점인 골든 짐이나 플랜트 피트니스처럼 유료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기에 다양한 운동 기구가 비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름진 햄버거나 스테이크로 늘어나는 뱃살과 자책감을 줄이고 오기에는 충분하다. 24시간 불을 밝힌 피트니스 센터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이 찾아와 먹은 걸 최대한 덜어내거나 지방을 근육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거기엔 종종 나도 포함된다. 


몇 년 전, 허리가 아파 고생한 적이 있다. 운동을 잘못해서가 아닌 잘못 앉아서다. 원래 좋지 않은 자세로 종일 글을 쓰다 보니 늘어야 할 글솜씨는 늘지 않고 허리의 통증만 늘더니 급기야 제대로 앉지도 못할 상태가 되었다. 미련하게 한 달을 버텼는데, 그 후엔 지압 훌라후프를 돌려도 괜찮을 정도로 멀쩡해졌다. 살짝 고문 같은 지압을 즐기며 느긋하게 TV까지 볼 수 있게 됐다.


(인적이 뜸한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의 피트니스 센터 전경. 아무도 없을 땐 환기팬 돌아가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이 들린다. 사진= 박인정)



그리고 난 최근 요통을 얻었다. 이번에도 모니터 속 활자 세계에 푹 빠져 꼰 다리를 너무 오래 유지한 탓이다. 소설 초고를 마침내 완성하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요통이 가라앉길 기다렸으나 허리는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도 아팠고, 침대에 누우면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허리서부터 올라와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자기 전 진통제를 삼키는 나에게 남편은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사실 병원이 안 괜찮았다. 애리조나 투손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투손이 워낙 건조한 지역인 데다 수돗물에 석회 함량이 많아서 그런지 물갈이를 세게 했다. 억울한 건 티가 잘 안 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픈 데가 속눈썹이 자라는 눈꺼풀 안쪽 살이었다. 원체 좁고 붉은 데가 아무리 붓고 빨개져 봤자였다. 심지어 내가 봐도 내 눈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어찌나 가렵고 따가운지, 손으로 비비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비가 아까워 버틴 인고의 3주가 눈가의 주름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자포자기한 나는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의사의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빠져나오는 내 손엔 치약만 한 연고가 2개나 들려있었다. 
 
유통기한이 채 1년도 되지 않는 연고는 코끼리 눈꺼풀을 온통 바르고도 남을 양이었다. 가격은 무려 100불이 넘었다. 마땅한 보험이 없어 그 값을 온전히 치러야 하는 나에게 그 많은 약은 너무 낭비처럼 보였다. 목욕을 자주 하라는, 가습기를 사서 항시 틀어 놓으라는 의사의 뻔한 조언은 열흘 전에 진료를 예약하고 기다린 노력과 시간마저 아깝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얘기를 한번 실천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새해였고, 작심 3일로 시작해 보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바질 화분을 산 게 그즈음이다. 새해를 맞아 집에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었고, 남편이 스테이크를 굽기로 했으니 신선한 바질은 스테이크에 곁들여도 좋고, 관상용으로도 좋을 듯싶었다. 조촐한 신년 파티가 끝나기가 무섭게 바질 화분은 풀이 죽기 시작했다. 완벽한 환경이 갖춰진 거대한 농장에서 살다가 한순간 손바닥만 한 화분에 옮겨져 생 이파리까지 뜯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물을 주고 광합성을 시켜주었다. 그래도 바질은 자꾸만 시들어갔다. 너도 시드는구나 싶었다. 예전엔 가만히 있어도 절로 낫던 내 허리도 언젠가 저 바질 줄기처럼 굽어 더는 꼿꼿하지 못한 날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향기를 잃고, 생기를 잃고, 결국 모든 잎을 떨구고 흙으로 돌아갈 미래가 비단 비좁은 화분 속 일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운동이란 시들어가는 내 몸을 직면하는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코 전보다 젊어지지 않을 육체를 인정하고, 그래도 단련하고 아껴주는 행위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 내는 일. 그래서 난 전신거울 앞에 선다. 제각기 다른 피부색과 몸무게를 가진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스쿼트를 하고 바벨 봉을 든다. 언젠가 죽을 화분에 오늘도 물을 주는 이유는 아직 살아있어서다. 여전히 목이 마르기 때문이다. ‘언젠가’라는 아직 오지 않은 훗날에 현실을 내주고 마지막 잎새를 떨굴 날만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만 있기엔 내 허리는 너무 뻐근하다. 조금이라도 움직여 줘야 살 만하다. 


(직접 만든 화분에 심은 다양한 크기와 생김새의 선인장들. 사진= 박인정)


꾸준한 운동 덕분에 나아지긴 했으나 은근한 요통은 여전하다. 이제는 어떤 감각처럼 익숙해진 통증은 맞춰놓은 알람처럼 정기적으로 내 발에 운동화를 꿰게 만든다. 덕분에 체지방이 줄고 근육량이 늘었다. 몸이 안 좋아진 탓에 몸이 좋아지는 이 아이러니가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다. 그래도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여 얻은 성과라 뿌듯하다. 뭐든지 다 나쁜 법은 없나 보다. 오늘은 볕이 좋다. 오래간만에 집 안의 먼지를 탈탈 털고 키우는 화분들도 발코니에 내다 놓았다. 시들고 볼품없어도 바질 화분은 여전히 숨이 붙어있다. 굽어진 허리로도 꿋꿋이 햇살을 받고 물을 마시며 내일의 해를 기다린다.


영월매일에서 동시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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