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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Feb 04. 2023

퐁퐁, 폼폼 우리는 여전히 달리고 있습니다

기차나 이 차나 결국 종점에 다다를 거라고.

“도끼를 가져올 걸 그랬어.”


우스갯소리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2023년 새해전야, 우리는 달리는 기차 안이었다. 한나절을 내리 달렸음에도 남한보다 7배나 큰 텍사스주를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차창 밖은 이미 별이 모일 만큼 컴컴했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철길을 따라 이어진 지붕들 위로 수많은 폭죽이 퐁퐁 솟아올랐다.


이번 새해는 대륙 횡단 열차 안에서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함께 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남편의 오랜 버킷 리스트가 희한하게도 내 입에서 나왔다. 안 그래도 연초에 교수님들과 친구들을 보러 애리조나 투손을 방문할 예정이었고, 투손에는 미국의 46개 주와 캐나다의 3개 주를 거치는 국영 여객 철도인 암트랙(Amtrak) 정거장이 있었다. 


우리는 큰맘 먹고 가장 좋은 등급의 좌석을 골랐다. 그렇다고 영화 ‘설국열차’의 맨 앞칸처럼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호사스러운 자리는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갖은 밑창에 짓눌려 납작해진 푸른 카펫에는 묵은 때가 선명했고, 이층 침대 중 하나는 소파를 접어야 나왔으며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었다. 장난삼아 농을 던지긴 했지만 ‘설국열차’의 한 장면처럼 도끼날로 생선 배를 가르고 ‘해피 뉴 이어!’를 외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공간도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비싸지만 비좁은 객실 안에서 서로의 무릎을 맞댄 채 일회용 컵에 담긴 적포도주를 기울이며 새해 덕담을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휴스턴에서 투싼까지 약 25시간 머물렀던 Roomette 객실. 두 개의 소파를 접으면 한 개의 침대가 나온다. 사진=박인정)


꼬리 칸을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은 아닌가. 마치 양갱처럼 각이 진 스테이크 한 덩이가 플라스틱 접시에 나왔을 때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해동된 줄기 콩은 너무 물 빠진 색이었고, 메쉬드 포테이토는 누가 뱉고 뭉개놓은 것처럼 보였다. 저녁 6시, 식당칸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예약제였다. 우리가 먹고 일어나야 다음 승객에게 순번이 돌아갔다. 나는 마지못해 냅킨을 무릎에 깔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레어로 주문한 스테이크는 어찌나 육질이 치밀한지, 역시나 플라스틱인 나이프 날에 자꾸만 딸려 나갔다. 화병 속 시든 장미꽃을 바라보며 나는 스테이크 한 점을 들었다. 눈이 절로 홉떠졌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맛있었다. 그것도 꽤. 어떤 재주를 부린 건지 시각적으로도, 썰기에도 분명 미덥잖은 고기가 입 안에서 사뭇 다른 장르가 되었다. 가니쉬도 선방했다. 줄기 콩은 적당히 아삭했고, 간이 잘 된 매쉬드 포테이토는 입에 착 감겼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열차 대신 내가 달리기라도 듯 무척 허기진 탓도 있었으나 팁이 아깝지 않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암트랙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과연 뜬소문은 아닌 듯싶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객실로 돌아와 와인병을 마저 비우고 잠이 든 승무원을 깨워 침대를 만든 다음 하나씩 자릴 잡고 누웠다. 포만감과 술기운에 무장 해제된 몸이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스르르 눈꺼풀이 감겼다. 


그때 본 것이다. 차창 밖으로 어룽어룽 피어오르는 불꽃들을. 열차가 달리는 소리에 묻혀 음 소거된 크고 작은 폭죽들은 마치 검은 바다를 상승하는 야광 해파리 떼 같았다. 동그랗고 촘촘한 민들레 꽃씨가 사방으로 퍼지는 것만 같았다. 자정이 되자 축포처럼 일제히 터진 폭죽들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서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중간역인 샌 안토니오 역이었다. ‘여보. 당장 내리자.’ 마치 포성처럼 지천을 울리는 소리가 정차한 기차 밖에서 들려오자 나는 얼른 침대서 일어났다. 남편의 대답을 듣기도 전 객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우린 저 반듯한 길을 벗어난 거야.”


몇 년 전, 투산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피닉스로 향하던 I-10 고속도로에서 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깻잎을 사러 한인 마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운전대를 쥔 남편의 손등에서 자꾸만 힘줄이 돋아났다. 남편을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내 말투엔 자꾸만 가시가 돋쳤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남편의 피로도가 한창 극심했을 때였다. 서로를 독려하기는커녕, 서로의 언성이 바벨탑처럼 드높아질 때였다.


땅이 꺼지라 깊은 한숨과 함께 조수석 바깥으로 내몬 내 눈에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진 철로가 보였다. 그 철로를 따라 달리는 화물열차가 보였다. 열차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맞는다고. 우린 묵묵히 따라가면 되는 순탄하고 안정된 길을 뒤로 하고 이 2013년형 혼다 시빅을 몰고 이 낯선 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보라고. 우리보다 훨씬 더 나은 자동차와 운전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도로를 저들은 또 얼마나 많이 달려봤겠냐고. 모든 게 다 처음이고 부족한 우린 힘들 수밖에 없고 느릴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거라고. 기차나 이 차나 결국엔 종점에 다다를 거라고.


마음속 고민을 구체화하고 빗대어 눈에 보이게끔 만들면 조금 만만해 보인다. 씹어 삼키는 데 일용한 물 한 모금처럼 적용한다. 그때 그 말이 얼마나 남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사실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나를 위한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여전히 달리기에 서툴다. 차는 여전히 중고차고, 돈보다는 걱정이 많다. 하지만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만둘 생각이 없다. 잠깐 멈춘 경유지에서 우연히 만난 불꽃축제는 그런 우리를 독려하는 듯했다. 치어리더가 힘내라고 흔드는 폼폼 같았다. 


(열차 2층에 마련된 조망 칸에서 바라본 올해 첫 해돋이. 사진=박인정)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간 객실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있는 1층으로 내려와 새우잠이 든 남편의 한쪽 광대 위로 여명이 내려앉았다. 붉게 타오르는 초원 위로 머리에 큰 뿔이 달린 사슴 무리가 달음박질쳤다. 어찌나 가까운지, 대지를 박차는 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잠을 설쳤는지 얕게 코를 골았다. 나는 일부러 남편을 깨우지 않고 새해의 해가 지평선을 달구는 걸 지켜보았다. 우리 객실은 한 뼘인데 차창 밖은 무척 광대해 도무지 끝이 없었다. 마치 망망대해 같았다.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 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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