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로’ 어디서 왔습니까?
애리조나의 새파란 하늘과 거대한 선인장이 아직 낯설었던 첫 학기 겨울, 남편 시준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부서에서 마련한 홈 파티에 우리 부부도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예전에 두어 번 얼굴을 봤던 교수 알렉스와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몇 잔 걸친 포도주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2m에 가까운 키의 출처가 문득 궁금해졌던 것일까. 나는 그에게 ‘Where are you really from?’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조상은 어디서 왔습니까? 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우리 대화를 경청하던 시준은 적잖게 당황했고, 당장 내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알렉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Where are you from? 즉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라는 말은 미국에 살던 우리 부부가 심심찮게 들었던 질문이다. 우린 숱하게 들었던 그 말을 조금 변형해 되돌려주는 걸 당시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영어가 유창하고 금발에 회청색 눈을 가진 알렉스가 1세대 이민자나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고, 그렇담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온 것인데 어느 나라에서 떠나온 것인지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인종을 차별하는 건 생각보다 쉽다.
그게 인종차별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게 더욱 어렵다.
히잡을 쓴 여성, 밝은 피부의 흑인, 중국인이 아닌데 ‘니하오’라고 인사받는 동양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질문 중 하나가 Where are you really from? 이라는 사실을 나는 파티가 파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미국 내에선 누가 이 질문을 던지면 자신의 문화를 알리고 계몽할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쾌함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언젠가 ‘Where are you really from?’이 인종차별인지 아닌지 지인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인끼리도 인종차별이다, 아니다 팽팽하게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듣는 사람이 부당하다 느끼면 차별적 발언이라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참 작은 나에게 선뜻 고개를 숙여 자신의 조부모가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알려준 알렉스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감정이 든다. 교수님, 단언컨대 미러링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노란 야생화 브리틀부시(Brittlebush)로 수놓아진 봄의 투손 (사진=박인정)
차별이라면 내가 공항에서 겪은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도 인천공항에서 말이다.
4년 전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나는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가까운 구청을 찾았고, 새로 여권 사진을 찍어야 갱신이 가능하다는 말에 구청에서 가장 인접한 사진관에서 즉석 사진을 찍었다.
인화된 결과물을 보고 나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묘하게 회갈색이 섞인 필터에 포토샵의 관용이 삭제된 민낯의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동양인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사진을 찍을 여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포토샵 브러시 한 번 까닥하지 않는 나이 지긋한 사진사의 마우스 질에 두 번째 결과물이 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평점을 확인하고 찍을 걸 그랬어….’ 뒤늦은 자책을 하며 결국 나는 사진을 들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섰다.
아무 사진관에서 아무 화장기 없이 찍은 여권 사진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두 번이나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버린 것이다. 국제 전염병의 시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본인보다 여권에 부착된 사진이 부쩍 신임을 얻은 까닭이었다.
당시 입국자 분류작업을 하던 이들은 가슴팍에 태극기를 단 육군 현장지원팀이었다. 뽀얀 피부의 상큼한 아이돌에게 익숙할 젊은 군인들에게 원체 까무잡잡한 피부에 사막의 내리쬐는 태양에 바싹 타버린 데다 포토샵의 은총을 받지 못한 내 사진은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두 번씩이나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동행한 남편과 다른 줄을 서게 된 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11시간이 넘는 장시간 비행에다 6년간 유학생 인생을 축약한 돌덩이 같은 배낭을 메고 오래간만에 귀국한 터라 더욱더 그랬다.
저 한국인인데요?
또다시 나를 외국인들 뒤에 서게 하려는, 출처 모를 피곤과 짜증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와 손짓으로 나를 인솔하는 젊은 군인에게 참다못한 내가 쏘아붙였다. 당황과 놀람이 뒤섞여 동그래지던 그의 눈동자와 결국 터지고 만 남편의 웃음소리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고 웃음이 난다. 그런데도 내가 덤덤하게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 그 일이 한국에서 벌어져서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겪은 일이라서다. 직접 외국인이 되고 나서야,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6년을 버티고 나서야 타지에서 다른 색과 인종으로 분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에 대해 진지해졌다.
손가락질 따위로 대놓고 드러내는 차별부터 어딘가 모호한,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만드는 은근하고 지능적인 배척까지. 미국에서 빈번했던 일이 여기라고 없을 리 만무하다. 일단 피부가 좀 어둡다는 이유로 자국민을 외국인 취급하던 공항 검역소에서부터 그렇다.
외국인을 통솔하던 그 친구들은 왜 그리도 불친절했는지.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역병의 시대, 국가에 봉사하는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기만 해도 갑갑한 방역복과 페이스 쉴드를 착용하고 온갖 사람이 드나드는 공항에서 복무하게 된 억울한 청춘의 불만과 피로를 차별로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동남아시아인이 아닌 백인의 외양을 닮았더라면 과연 그런 대우를 받았을까에 대해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렇듯 차별은 쉽다. 성별, 나이, 체형 등 내가 남과 구별하는 척도는 얼마든지 있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차별적 발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친분을 방패 삼아,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려는 수단 삼아 구별인지 차별인지 애매한 발언을 섞어 농담처럼 내뱉는 버릇이 있는 내가 일단 그렇다. 내가 이러니 남도 이럴 거라는 단정 짓기를 줄이고, 나는 이런데 다른 사람도 그럴까 한 번쯤 짚고 행동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런 나이기에 지난 미국에서의 삶은 의미가 있다. 집 밖만 나서면 언제든 인종차별 당할 가능성에 노출된 채 살아온 지난 날은 홍대의 문신투성이 외국인 영어 선생님들과 이슬람 국가에서 제주도로 피난 온 난민들을 향한 나의 근거 없는 편견과 해묵은 관념을 되짚게 해주었다. 내가 얼마나 단일한 시선으로 이 다채로운 세상을 해석하려 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랏빛으로 진해지던 창문 밖 노을 (사진=박인정)
2002년, 한창 월드컵으로 한국이 들썩였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는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 색을 ‘살 색’으로 이름 붙인 것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다.”라는 개정 권고문을 발표했다.
살 색이 살구색으로 탈바꿈하듯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전염병마저 공유하는 오늘날, 한때는 단일민족이라 일컬어지던 한국에도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유입되고 다문화 가족 또한 늘어나고 있다. 단지 외양만으로 판단하고 판단 당하지 않는 내일을 위해 오늘의 나는 이런 글을 쓴다. 피부가 살굿빛이 아니라고 외국인으로 단정 짓는 단순한 사람들보단, 한국 여권에 적힌 한국 이름을 읽을 줄 아는 독해력 좋은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본다.
영월매일에 동시 연재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