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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그림씨 Feb 27. 2023

“사람들 수만큼의 우주가

“사람들 수만큼의 우주가”
중도일보 오피니언 [풍경소리] 2023/2/14/게재


글_조훈성(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겨울에 우선 드는 생각은 봄의 기다림이다. 산에 들에 찾아올 봄을 기다리는 것은 아마 이 계절의 황량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계절의 온도보다 사람의 온기에 대한 갈망이 봄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또 이 세계에 대한 연극적 상상으로 굴속 아닌 굴속 같은 극장으로 내 발을 이끌게 된다.


입춘(立春)을 넘기고서야 나는 최인훈의 1977년 작, 「봄이 오면 산에 들에」를 다시 펼쳐본다. 문둥이 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문둥이 어미와 말더듬이 아비를 둔 달내, 그의 연인 바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연극의 바람소리를 잊지 못한다. ‘봄이 오면’이라는 불확실한 희망의 예정 속에 겨울밤의 절정에 다다르는 그 바람소리도 소리려니와 말더듬이 아비의 느리고도 느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는 마치 화로의 꺼져가는 숯의 불씨처럼 느껴지면서 달래 가족을 통해 전달되는 그 겨울의 메아리를 되새김하게 되기 때문이다.


달래네와 같이 위태롭게 화롯불을 바라보고 있는 고립된 수많은 이웃의 숨, 목소리가 시시각각 매체에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운데 무고한 민간인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고 있으며,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은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리만큼 사망자만 이미 2만 명을 넘겼다고 알려졌다. 국내 소식도 봄다운 뉴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여전히 겨울의 차가운 광장 합동분향소에선 희생자 추모가 끝나지 않고 있으며,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권리보장운동이 사회적 이슈가 된 가운데,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온통 ‘위태롭고 절박하게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 투성이로 얼룩져있다. 그 수십 년 전의 희곡 안에서 이 모순덩어리 같은 우리 세계를 투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회에서의 ‘소외’된 이들은 정상적 사회구성원에서 ‘실격’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노약자,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그리고 혈연-지연-학연의 권위적 사회에서 차별 탈락한 이들까지 차이만 있을 뿐 이들 모두의 삶은 비극적이다.


성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봄은 멀게만 느껴진다. 사람의 온기 없는 사회가 봄이 왔다한들 봄 같은 사회일리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 피해자들의 피해자이면서 회복할 수 없는 피로감으로 애써 소외된 이들의 숨과 목소리를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긴장과 대립의 우리 현실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이던가, 모든 호흡이 느려진 이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하릴없이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느냐는 저 건너편에서 안부를 전하는 소리가 불편하다.


엊그제, 김지하의 마당극 「밥」(1985)을 찾는 친구 덕분에 서가 구석에서 대본을 찾아 읽는다. 제3마당 ‘나는 밥이다’에서 옥중 죄수들끼리의 재판놀이가 새삼 재미있게 읽힌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판하겠다는 겁니까?”, “판사와 검사의 자격미달에 대해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판이 개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등의 대사에 모처럼 미소가 번진다. 유언비어 유포죄로 감방에 들어 온 ‘호구거사’를 재판하면서, “너나 나나 모두 밥이다”는 말을 몇 번이나 따라 중얼거린다. 분노하는 사람들, 우리는 결국 이 사회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호구 잡혀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누구 말처럼, 사람들 수만큼의 우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애초에 그만한 우주를 이 세계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이 올려질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다. 셰익스피어의 1594년경 작품이라 알려진 「한여름 밤의 꿈」에도 이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이니 젊은 연인이 사랑을 맹세하는 날에 대한 전통은 유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천하고 천하여 멸시할 만한 것이라도 사랑은 훌륭하고 품위 있는 것으로 바꾸어주지.”라는 대사처럼, 나는 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마주한 연인과의 사랑처럼- 우리 바라보는 세계, 우리가 사는 이 세계, 곧 ‘위태롭고 절박하게 사는 세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봄, 봄이 오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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