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프랑스와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민음사, 2018)

by 도도히


다가오는 사랑과 견디는 사랑...


프랑스와즈 사강(1935~2004)은 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나 퇴학당하고, 생미셸 대로의 카페와 클럽을 드나들었다. 후에 ‘나는 영혼의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토로한다. 소르본 대학 입학시험에 낙제하고, 18세 되던 해 『슬픔이여 안녕』(1954)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작가는 교통사고, 음주, 약물 중독, 도박 등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는다. 한 풍자 쇼에 출연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신을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어진 삶을 다채롭게 살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그녀가 스물네 살 때 쓴 작품으로, 주인공 폴이 서로 다른 두 남자와의 사랑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독자들은 제목을 통해서 벌써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사랑을 연상했을 것이다.


브람스는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여섯 아이의 엄마로 가정에 충실한 정숙한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름다운 클라라 슈만을 사랑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연인과 우정을 쌓으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음악 속에 담았던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처지에 따라 빛깔과 온도가 저마다 다르다.


주인공 폴은 이혼 경력이 있는 서른아홉의 중년여인이다. 전 남편 마르크는 ‘몹시 부자였고, 친절했으며 사교적인’ 남편이었다고 회상한다. 이혼사유를 물으니 그에게 맞추어 살다보면 ‘거짓말을 할 것’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도 자기만의 세계를 갖기가 어려우면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을 알 수 있다. 부족한 현실일지라도 자기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고,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사는 자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돈 많고 멋진 사람과 사는 데엔 그만큼 구속력이 강하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현재 남친 로제와의 관계는 서로 자기들의 생활권역으로 상대를 들이지 않는다. 서로가 속박하지 않으며 자유를 추구한다. 만나고 싶으면 이쪽저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사랑을 나눈다.


로제는 일 때문에 출장을 간다느니 회사일로 바쁘다느니, 일을 핑계로 매춘녀와 바람을 피운다. 폴은 알면서도 속아주고 그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기다리며 구속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며 고독한 자유를 즐길 뿐이다. 그러면서 사랑은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 애송이 시몽이 폴에게 다가온다. 폴은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폴과는 열네 살이나 어리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도 나이 차가 많은 연하 남은 좀 불편했나 보다. 오롯이 폴만을 향해서 직진하는 시몽의 사랑을 머뭇거리며 응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눈물을 글썽이며 짐을 꾸리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몽을 보내면서 ‘나는 늙었어’라고 독백을 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연하커플이 대세다. 그것도 10년 안팎의 어린 남편과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나, 딸 뻘인 아내와 늦깎이 결혼을 해서 사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띤다. 그래서인지 내가 폴이라면 로제보다는 시몽 쪽이 매력적이다. 수시로 거짓말을 해대며 메지와 관능적인 사랑을 나누는 부정한 로제보다, 오직 폴만을 사랑하며 그 주변을 맴도는 시몽의 신선하고 풋풋한 사랑이 마음에 찬다.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을 꺼내며 폴에게 다가왔다. 차분한 성격에 절제된 감정으로 자기 일에 열심인 폴이었지만 외로웠던 폴은 점점 시몽을 받아들이게 된다. 로제의 잦은 일탈과 방치가 폴에게 시몽의 사랑에 젖어드는 틈서리를 만든 것이다.


삼각관계다. 스물다섯 순수한 젊은이와 관능적인 사랑놀이에 빠진 중년 남자, 그 남자를 버리지 못하고 기다리며 외로움을 견디는 폴, 그들의 관계는 서로 물고 물리는 구도다.


평론가들은 사강의 작품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사랑의 덧없음’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또한 ‘작품은 심오한 철학도, 이데올로기도, 참신한 소재도 없다....다만 재즈처럼 리듬감 있게 펼쳐지는 문장과...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으로 매혹시킨다’고 평한다.


사랑은 주어진 환경에서 서로 눈이 맞아 실현되거나, 제한된 조건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남녀가 만나면서 이루어진다. 짧은 기간의 만남을 통해 평생 동안 함께 할 생의 동반자를 선택해서 인내하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랑도 2~3년 이상 버티지 못한다고 믿었다. 대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감각적인 사랑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폴에게 빠져 오롯이 그녀만을 향해서 살아가는 시몽, 그를 사랑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생각으로 자신없어하며 로제만을 기다리고 견디며 사는 폴, 창녀 메지와 관능적인 사랑과 일탈을 즐기는 로제.... 결국 이들의 관계는 끝없이 물고 물리는 관계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며 산다.


갑자기 브람스 음악을 듣고 싶다. 그러나 브람스를 선곡하기에 앞서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듣는다. 처연한 사랑과 결별이 응축된 격정으로 소용돌이치며 진하게 가슴을 울린다. 왜일까. 순수하고 풋풋한 봄날은 짧고, 수면아래 꿈틀거리는 뜨거운 사랑의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기 때문일까.


어떤 사랑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뜨거운 열기는 식고 모든 감정은 평범한 감각으로 무화된다. 더 이상 설렘이나 감동은 없고 지루한 일상이 되풀이 된다. 폴은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서 이성과의 환상을 버린다.


브람스 음악은 첫 소절부터 사람을 사로잡는 음악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음악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무겁게, 반복하며 다가오고, 그래서 더 깊이 스민다고.


작품 속 캐릭터는 브람스 음악을 연상시킨다. 폴은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을 떠올린다. 이 악장은 아름답지만 쉽게 고조되지 않는다. 환희 대신 쓸쓸한 평온이 흐른다. 폴은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볼 수 없다. 사랑의 감정은 흐르되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다.


시몽은 브람스 간주곡 op.118 no.2 을 떠올린다. 젊음의 온기가 있으며 부드럽고 다정하다. 그러나 곡 전체에 뭔가가 이미 지나가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지만, 폴의 시간과 속도가 다르다. 사랑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쉽게 놓고 싶지 않은 감정. 간주곡에서 느껴지는 정서다.


로제에게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 물으니 바그너라고 말한다. 바그너 음악이 그럴까 생각해본다. 그의 거침없는 일탈과 관능적인 여인과의 사랑이 연상된다. 거친 호흡으로 제멋대로인 감정을 풀기 위해 메지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는 그를 상상해본다. 폴을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본능적인 욕구를 채운다.


폴과 로제는 설렘과 긴장은 없으나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서로 원하고 찾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선 밖으로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향해 있다. 그래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고향처럼 서로에게 돌아오는 구심점을 갖는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수많은 만남 속, 특별한 기억들을 반추하면서. 그 중 평생 동반자인 한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한 때는 그와의 모든 것이 높고 푸르게만 여겨졌다. 겸손함과 진실함이 매력으로 다가오던 첫 이미지, 풋풋하고 싱그럽던 순간들,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흘러가던 전성기, 그리고 돌아와 거울 앞에선 빛바랜 머리칼과 잔주름들...그리고 소중한 여백과 그 후에 흘러갈 무심한 강물까지.... 유년의 냇물은 흘러서 그렇게 바다로 간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남편이 귤 박스를 뒤적이다가 물컹하게 상한 귤을 발견했다.

“이거 귤이 좀 상했는데 먹어도 되나?”

“많이 상하지 않았으면 상한 쪽만 떼어내고 먹어도 됩니다.”

나는 버리라는 말 대신, 평소에 내가 그러듯이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먹으라고 했다.


그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내 입에 새콤한 귤을 들이밀었다. 무심히 받아 우물거리다 생각하니, 상한 귤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상한 귤 쪼가리를 자기 입에 넣지 않고 멀리 떨어진 사람 입에 넣어주다니...순간 속에서 기분이 상했다. 시고 맵고 짠 세월의 맛이었다고나 할까. 하루 종일 미끈한 식감이 입안에 남아 속앓이를 했다.


‘아니, 상한 귤 남은 쪼가리를 자기 입에 넣을 일이지 굳이 내게 들이밀어야 했나’ 늙어가는 모습이 측은하던 그가 밉살스러웠다. 한 평생 남편과 가족만을 위해서 헌신한 파트너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만 같아 자존심이 뭉개진다. 그동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출렁이며 밀려온다. 함께 산 세월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고 서운함이 싸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이렇게 무성의하고 헐렁해졌구나.


그는 별 생각 없이 그랬다지만 상대방은 왼종일 기분이 상해서 삐져 있었다. 헌신과 노고는 과거사가 되고, 남은 건 그저 무감각한 관성이라니. 긴장과 탄력은 사라져도 진하고 끈끈한 정은 마지막 보루일 줄 알았는데. 굽은 어깨와 희미한 눈빛, 삶의 동력이 되어줄 그 무엇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이 주는 배신감이 아슴하게 밀려든다.


폴은 시몽과의 사랑을 끝내고 로제와 제대로 시작하기로 한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던 시몽의 물건들을 모아서 짐을 꾸리게 한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다. 그러나 시몽은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층계를 내달린다. 짐은 그대로 놔 둔 채.... 그는 스물다섯 살,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려간다’라고 표현한다.


저녁 8시 로제의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나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처음 시몽이 폴에게 던진 말을 생각해 본다.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독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무디고 느린 감정을 얼마큼 견딜 수 있을지, 쉽게 위로받지 않아도 괜찮은지, 사랑이 고독하게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우아하게 외로움을 즐기면서 사랑을 견딜 수 있을지....모든 것이 회의적이다.


어디선가 아그네스 발차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흩어지고, 그 여름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소설의 결말은 애매모호하지만 명료한 사실을 전한다. 로제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폴을 방치해 둘 것이고, 폴은 뻔한 거짓말을 하는 로제를 통제하지 못하고 체념하며 삶을 견딜 것이다. 시몽은 그런 폴을 떠나지 않고 그녀 곁을 맴돌며 사랑을 이어갈 것이다. 인생은 끝없이 되풀이 되며 덧없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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