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의 KBO리그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을 국민들에게는 여가 선용을!”이라는 멋진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프로”임을 표방하는 한국야구위원회 주관의 한국야구선수권대회(2015년부터 KBO리그라는 명칭으로 변경)가 지난 1982년에 출범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초대 총장직은 서종철 전(前) 국방부장관이 맡았는데,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적 배경을 십분 활용하여 대기업들을 주도적으로 설득하여 이들의 리그 참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고, 원활한 대회 진행을 위한 경기장 설비 관련 각종 예산(조명탑 설치, 보수 공사 등) 또한 정부로부터 일정 수준 확보하였다.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적 상황과 이슈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프로야구 리그를 창설하고 운영한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긴 했지만, 컬러 TV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즐길 거리가 턱 없이 부족했던 국민들에게 있어 프로야구는 훌륭한 여가 선용의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1982년 잠실야구장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숙적 일본을 꺾고 국민들에게 우승을 선사했던 실업 리그의 스타 선수들이 대거 프로에 입단하면서부터 한국야구선수권대회는 조금씩 흥행의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눈에 띄게 두드러졌던 지역 감정의 불씨 또한 영남과 호남의 라이벌 전이라는 형태로 야구장에서 활활 불타올랐고, 호남을 연고지로 두고 있던 해태타이거즈는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다년 간 리그를 제패함으로써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한 없이 드높여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 이외에도 당시의 프로야구단은 이를 운영하는 대기업들의 입장에서도 효용 가치가 높은 훌륭한 홍보 수단이었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사세가 확장되면서 이들이 취급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품목 수는 전례 없이 다양해졌는데, 이러한 자사의 경쟁력을 대내 외에 널리 알리고자 함에 있어 TV와 신문 광고는 그 물리적 한계로 인해 분명 부족함이 존재하는 홍보 수단이었다(방송 시간, 매체 구좌 수의 한정, 비용 문제 등).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역동적으로 운영되었던 프로야구단은 대기업들의 묵은 고민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는 훌륭한 홍보 수단으로 기능했다. 비록 운영에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긴 했지만, 수십 종의 언론에서 매일같이 다루는 경기 내용과 선수, 그리고 구단 관련 소식 등은 브랜드 홍보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여기에 더해 정부의 요구에 야구단 창단 및 운영으로 화답했던 대기업들은 이후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직, 간접적인 정부의 지원 또한 누릴 수 있었다.
정부의 강권으로 한국야구선수권대회에 뛰어들게 된 대기업들은 “주식회사”라는 형태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프로”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주도성에 대한 컨센서스와 더불어 당시 벤치마킹 했던 타 선진국의 프로야구리그의 형태가 그러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적으로 주식회사는 이윤 창출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설립하므로 창업에 앞서 예상 매출액 등이 반영된 수익 구조를 명확히 설정한 뒤 목표로 하고 있는 영업이익(또는 당기순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매출원가와 판매 및 관리비 등의 비용을 산정하게 된다. 그러나, 국내 프로야구단들은 주식회사임을 표방하긴 했으되 주식회사로서 영속할 수 있는 미래상을 고민하는 대신 창단 그 자체를 당면 과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선수단 연봉 산정을 우선 시 했는데, 향후 직업 유지(프로는 단 년 계약을 갱신하는 형태)의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참가 선수들이 실업팀에서 받던 연봉의 10배 수준(1,215만 원)을 평균 연봉의 기준으로 삼았다. 주식회사로 존재하기 위해 마땅히 존재해야 할 수입원이 불확실(또는 부재)한 상황 속에서 특정인의 직관에 의해 손 쉽게 결정되어버린 높은 수준의 고정 급여와 운영비 등은 훗날 프로야구단이 만년 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순 노출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방송 및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모기업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인지 정도를 제고시키고, 야구 경기 진행을 통해 모기업 및 계열사들과 연고지 팬들 간의 유대감 형성이라는 역할을 쏠쏠히 수행했던 프로야구단은 산업과 매체가 고도화 되면서 점차 홍보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었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을 집행하면서도 보다 직접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상품과 서비스를 홍보할 수 있게 된 세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모기업의 간접 홍보 수단으로서 근근하게 기능을 이어나가던 커다란 덩치의 프로야구단은 그 존재 가치에 의문 부호가 붙게 되었다. 이는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로농구단이나 프로배구단처럼 프로임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실업팀에 가까운 세미 프로의 형태로 특정 기업의 홍보 부문에 속한 채 철저히 비용 집행의 관점에서 주어진 홍보 목표 달성을 위해 운용되는 형태였다면 상황은 달랐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야구단은 지금까지 모기업의 홍보 수단으로서 기능은 했으되 분명 독립된 전문 법인이었고 전자의 역할을 수행하든 혹은 다른 형태로 기능하든 당장의 생존을 위한 운영비는 직접 벌어야만 한다는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홍보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관련 부문에서의 기능 발휘를 통해 자생을 도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렇듯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거대한 부실 덩어리로 변모해가는 프로야구단을 유지시키기 위해 각 구단의 모기업과 계열사들은 해마다 지원금의 액수를 늘려나갔다.
주식회사임을 표방하며 창단한 지 수십 년, 매해 참단한 수준의 적자를 호소하면서도 손익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흔들림 없이 존속하는 프로야구단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대기업들이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 즉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로야구단 운영을 대기업들이 소비자들을 위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종의 도리이자 비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로 인한 누적 적자의 심화와 끊임없는 팬들의 투자 확충 요구라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놓인 프로야구단들 중 일부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시장에 매물로 나온 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고, 훗날 경제 위기로 인해 모기업의 지원마저 끊어지게 된 일부 구단들은 끝끝내 인수자를 찾지 못한 채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 프로야구의 사회적 가치(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