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금색 휘장과 강렬한 배기음, 독특한 외양과 탁월한 운동성으로 모든 운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Porsche의 역사는 1931년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아들 페리 포르쉐와 함께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Porsche Engineering Office’라는 회사를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포르쉐(Porsche)라는 브랜드는 1948년에 공식 출범되었고 뒤를 이어 1950년에는 기업명 또한 포르쉐로 변경되었다.
포르쉐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지난 1900년(우리나라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치세 중), 휠 허브 모터가 장착된 전기 자동차 로너 포르쉐(Lohner-Porsche)를 제작했고, 이를 토대로 세계 최초의 사륜 구동 승용차를 제작했으며 또 같은 해에 가솔린과 전기를 혼합한 파워트레인을 개발함으로써 하이브리드의 원형을 창조하였다.
그는 1936년 국민(Volks)을 위한 자동차(Wagen)를 만들어 달라는 히틀러의 지시를 받고 이를 설계하여 훗날 비틀이라 불리게 되는 KdF 바겐을 세상에 선보였다. 혹자는 이러한 KdF 바겐을 천재와 악마의 악수이자 합작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KdF(Kraft durch Freude)는 당시 나치스 정권이 민족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국민들의 여가 선용을 권장하기 위해 만든 조직의 명칭이자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히틀러는 KdF 바겐을 기획함에 있어 아래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첫째, 일반적인 가족 단위에 맞춰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 혹은 성인 4명을 태울 수 있을 것
둘째, 시속 100km로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을 것
셋째, 가격은 저렴하게 1,000마르크 수준으로 책정하되 튼튼한 자동차일 것
넷째, 후방엔진 후륜구동(RR) 방식을 적용하되 혹독한 겨울 환경을 고려하여 공랭식 엔진을 탑재할 것
우리는 여기서 네 번째 조건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러한 방식은 이후 포르쉐가 선보인 스포츠카들을 상징하는 특징이자 주요 소비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을 얻는 차밍포인트였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이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을 엄청난 공포로 몰아 넣었던 Tiger 1, Tiger 2와 같은 강력한 탱크와 Elefant와 같은 자주포를 설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이라는 죄명으로 옥살이를 시작한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뒤를 이은 아들 페리 포르쉐는 아버지가 설계했던 KdF 바겐의 차체와 부품을 활용하여 1948년 6월 8일, Porsche 최초의 스포츠카인 '356 No.1 로드스터'를 세상에 선보였다. 이 때 그가 남긴 명언이 바로 오늘날에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내가 꿈꾸던 스포츠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었다”이다.
356은 1951년에 출전한 프랑스 르망 24시간에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포르쉐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하였는데, 이후 1965년 단종될 때까지 약 7만 8천여대가 판매됨으로써 포르쉐의 재건에 크게 기여 하였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손자인 알렉산더 포르쉐(일명 “부치”)는 포르쉐 스포츠카의 한 획을 그은 911의 창시자로,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은 지금도 포르쉐의 상징으로서 모두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포르쉐의 고성능 스포츠카로서의 브랜드 정체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고 다듬어져 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356은 프랑스 르망 24시간 데뷔 첫 해에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최신 기술들이 집약된 포르쉐의 다양한 스포츠카들이 대회를 휩쓸었으며 그 어떠한 자동차 브랜드들도 포르쉐의 독주를 막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제작되는 포르쉐의 모든 차종의 키 박스가 타 브랜드의 차종과는 달리 대회 출전용 차량들처럼 스티어링 휠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포르쉐를 최고의 스포츠카로 발돋움하게 해줬던 과거의 빛나는 역사를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싶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포르쉐는 오래 전부터 유명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차이기도 했다. 포르쉐의 매니아였던 제임스 딘과 폴 워커는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포르쉐와 함께 했고, 탐 크루즈, 데이비드 배컴, 아놀드 슈왈제네거 또한 포르쉐를 아끼는 스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장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으로 최고 성능의 스포츠카를 생산하는 것'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포르쉐에게 거짓말처럼 위기가 찾아왔다. 판매전략의 부재와 기존의 제작 방식을 고수한 까닭에 지연될 수 밖에 없었던 신차의 출시, 그리고 환율 변동(독일 마르크화 상승)에 대한 미숙한 대처는 포르쉐를 엄청난 위기로 몰아넣었고, 주가는 폭락했다. 1986년 5만 대 수준이던 판매량이 1993년에는 1만 4천 대 수준으로 급감하였고 이로 인해 무려 1억 2천만 EUR의 손실을 입게 되면서 포르쉐는 크게 휘청였다. 변화하는 시장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것이 기업의 영속을 위한 최선의 방안 중 하나임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이미 하나의 상징처럼 굳어있던 있던 브랜드의 정체성이 오히려 포르쉐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