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나의 부사관 생활을 대신했다면 어떠했을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청춘, 나의 20대는 육군 부사관 생활이 가장 큰 기억이다. 아버지의 20대는 나와 매우 달랐다. 우선 20대 초반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집안 어른들의 주선으로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를 만났다. 살림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전방으로 입영했다. 60년대 일이라 들은 말씀에 의하면, 험난한 군 생활을 하셨다. 매일매일을 구타 속에서 지냈고,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폭력이 난무했다. 요즘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군 생활이다.
나의 부사관 시절은 번민과 심적 고통이 계속된 시간이었다. 방공포병학교에서 6개월간 정비 기술을 익힌 후, 전남 벌교의 미사일 부대에 배치를 받아 4년 6개월간 복무했다. 1년 정도를 병사들과 함께 보냈는데, 최초 6개월간은 내무반 합숙이었다. 이 기간의 나는 마치 늑대 무리 속의 새끼 양처럼 무서움에 떨었다. 왜 선배 부사관들은 그런 판단을 했는지 모르겠다. 부대 적응에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오히려 병사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간극만 생겨났다.
내무반 생활은 야심한 시각과 새벽이 고비였다. 병사들 중 한 놈씩 돌아가면서 하루 한 번 이상 시비를 걸어왔고, 때로는 협박과 막말이 난무했다. 그래서 나는 온갖 방법으로 저항하며 어떻게든 그 공포를 견디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아버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군에서 선임병의 구타와 욕설이 하루 종일 이어졌고, 참아내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군 생활 내내 몸과 마음을 다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차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위협적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말 감사하고 고마웠던 일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무사히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총기 오발 사고로 이어가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참아내기 어려운 현실이었지만, 아내로의 무사 귀환 목표를 설정했고, 이루어 내셨다.
나는 6개월의 내무반 생활 후, 간부 숙소로 이동했다. 다시 6개월 후에는 영외 거주로 마침내 영내 생활을 마쳤다. 레이더 기지에서 나보다 먼저 배치받은 고등학교 친구와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며 영외거주를 축하했다.
아버지는 내가 군에 입대할 때도 다른 분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군 생활의 기억을 가졌으면서도,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다워지고, 사내라면 누구나 군에 다녀와야 한다. 군 생활은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라고 확고한 신념을 말씀하셨다. 사회 초년으로서 20대를 전방 부대에서 혹독하게 보낸 기억을 가졌지만, 부정적인 인식이 없으셨다. 내가 보내야 하는 60개월의 군 생활에 대해서 염려보다는 월급을 받으면서 사회생활의 기반을 닦을 것이라고 기대하셨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5년의 세월을 암울하게 보내고 말았다. 학습 여건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여가 시간에 하고 싶었던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매일 술과 담배 등 유흥을 즐겼다. 20대 초반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의무복무 만기를 한 달 앞두고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량진의 대입 종합 학원에 등록했다. 종합 학원 근처에 있던 단과 학원에서 새벽 6시부터 수학 강의를 들었다. 부평에서 노량진까지 첫 차와 막 차로 오가면서 10개월간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웠다. 군 생활 5년의 공백을 단기간에 메꾸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의 20대 군 생활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내가 아닌 아버지였다면.... 매사 신중하고, 힘과 의욕이 넘쳤으며 쾌활한 미소를 가졌던 아버지가 나를 대신한다면, 어떤 인생으로 가꾸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