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과 아픔이 함께 하다
초등학교 4학년쯤 일이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꿀벌을 한 통 구해 오셨다. 이날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꿀 벌과 함께 한 추억이 여럿 만들어졌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이번 해에만 벌집 수거로 119 구급 대원을 세 번이나 불렀다. 야생 벌은 그만큼 흔하다. 벌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한 방만 쏘여도 병원을 찾아야 하는 말벌 같은 경우에는 발견 즉시 전문가를 모셔야 한다.
도시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꿀벌을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꿀벌은 양봉업자들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기른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쯤의 내 고향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당 한편에 벌통을 3단쯤 쌓아 올려 여기저기 세워 놓았다. 꽃이 피는 이른 봄부터 꿀벌들이 온 마당 위를 윙윙대며 날아다닌다. 혹여라도 벌에 쏘일까 봐 마음이 저리던 꼬마(나)는 들키지 않으려는 듯 벌통을 조금이라도 멀리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어느 날은 아버지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아버지, 얼굴이 왜 그렇게 부어올랐어요?" "벌에 쏘여서 그렇단다" 내 물음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변하셨다. 40대였던 아버지는 벌에 쏘이는 것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쁜 농사일의 틈새를 이용하여 벌을 돌보아 보호망 착용이 마땅치 않았다. 부어오른 얼굴이 가라앉을만하면 또 쏘이곤 해서 멀쩡할 날이 없었다.
해가 지나면서 벌통 수가 늘어갔다. 분봉하는 날이면 우리 집은 초 비상이 된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논밭으로 일을 나가면서 우리 형제들에게 명령하신다. '벌이 새끼들을 데리고 나가는지 주의해서 살펴봐라. 분봉이 시작되면 어느 나무에 붙었는지 즉시 알리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여왕벌이 독립할 날을 대강 짐작한 듯하다.
마당에서 놀다 보면, 갑자기 벌들이 윙윙거리며 벌 통 위에서 떼를 지어 선회한다. 분봉이 시작된 것이다. 잠시 후 새끼 벌들이 이동을 시작한다. 우리도 함께 벌들을 쫓아간다. 산속 동네라서 큰 나무들이 무성하여 벌들은 멀리 가지 않는다. 대체로 동네를 조금 벗어난 곳의 나무줄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 광경을 목도하면 형제 중 한 명은 밭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린다. 아버지는 금세 준비해 둔 분봉용 벌집과 나뭇가지를 들고 망설임 없이 쓸어 담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3년 정도 지났을 즘에는 10통 이상의 벌집이 생겼다.
휴일인지 방학인지 모를 학교가 쉬는 어느 날이다. 꿀 분리 작업을 하던 아버지가 모양이 조금 훼손된 꿀을 한 움큼 가져오셨다. 마음껏 먹으라는 말씀에 숟가락으로 입에 넣었다. 강한 단 맛과 부드러운 향기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지금까지도 기억날 정도다. 주로 꿀을 시장에 내다 파느라 많이 먹을 수 없었지만, 가끔 맛을 볼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시골에서 자란 우리는 병치래를 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꿀벌 절도 사건도 있다. 어느 날 밤, 아버지의 꿀벌 세 통이 없어져 버렸다. 누군가가 훔쳐 갔다. 아침부터 아버지 형제들은 온 동네를 뒤졌다. 마침내 안골이라는 골짜기 밭에서 급작스럽게 얼기설기 지어놓은 벌집을 발견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집 형님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 집 형제들은 자기들 소행이 아니라고 부정했고, 증거를 대라며 큰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꿀벌을 찾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다. 어쩌다 시골에 가면 그 사건과 형님들이 매번 기억난다. '지금은 서울 어디쯤에서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고 잘 살고 있을 거야!'라는 부질없는 생각과 함께.
벌집 절도 사건 이후, 꿀벌이 아버지를 버렸는지, 아버지가 벌 치는 일을 그만두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벌집들이 하나 둘 줄어갔다. 어느 날부터는 벌들이 아예 없어졌다. 어쩌면 농사일이 바쁘고 관리도 어렵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벌 치는 일에 소홀하면서 자연스럽게 벌들도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기억 속의 꿀벌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