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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정 Nov 27. 2023

무의도에서

처음, 첫 경험, 말을 하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오늘은 내 운동사에서 처음으로 자전거와 맨발 산행을 함께 즐긴 날이다.


무의도는 대교가 연결되기 전부터 줄기차게 다녔던 곳이다.

주말 휴일 이틀 중 한 번은 무의도에 갔고, 그 결과 2017년부터 5년간 연평균 40회 정도를 기록했다.


트랭글이라는 운동 전용 앱에서 국사봉과 호룡곡산의 등정 순위 1위를 찍기도 했다.

예전의 무의도는 접근성이 나빴기 때문에 주말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직장 승진 시험에서 의도치 않았던 3진 아웃에 처한 상태로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고, 그로 인해 만사가 귀찮고 스트레스가 크게 자리한 상태였다.


교육청에서 수년을 근무하면서 정성을 들여온 세월이 물거품이 되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승진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교육청을 박차고 학교나 사업소로 나가서 다른 삶을 선택하거나 여유를 부릴 선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20여 년간 교육청을 중심으로 지냈기 때문에 인천시에 거주하는 지인들이 많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3진 아웃에 처한 나에게 "너는 못 난 놈이야!"라고 말한 이도, 말할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승진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이로 인한 심적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와도 만나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 없던 시절, 나에게 유일한 위안을 준 섬, 무의도였다.

이 섬에서 산을 타는 동안만큼은 지인을 만날 일이 없다는 이유가 편안함을 주었다.


제삼자의 시각이나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암울한 시기에 온전히 자유를 즐기며 심신을 달랜 섬이다.

그런 날들을 무사히 보냈기에 현재가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영종도의 지척에 위치한 섬, 무의도가 뭐 그리 접근하기 어려울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내가 다녔던 길은 하늘도시에서 무려 2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집 근처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7번 게이트)으로 가서 잠진도행 버스로 환승, 다시 잠진도에서 무의도행 여객선을 기다렸다가 승선하면 5분 후에 무의도에 도착한다.

물론, 잠깐이지만 바다 위에서 갈매기와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을 기분 좋게 영접하곤 했다.


오늘은 현관을 나서면서 무심코 등산용 스틱을 가방에 챙겼다.

'무의도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면서,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보이면 조금이라도 걷고 와야지'라는 마음이었다.


바람이 다소 차가웠으나, 오랜만에 바닷가를 달리면서 영종의 평화로운 바다와 하늘, 그리고 오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행복한가?'

'나는 주어진 내 삶의 시간들을 의미롭게 보내고 있는가?'

   

무의도까지 쉼 없이 렸다.

무의 대교를 넘자마자 자전거를 세워 두고, 등산 모드로 전환한다.


그래봐야 헬멧과 마스크를 벗고 가져간 스틱을 펼친 게 전부다.

양말과 신발을 벗어 가방에 넣고 맨발 걷기를 시작한다.


한 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면서 데워진 몸이라 차가운 바람에 금세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등산로에 접어들자 추위가 잦아들었고, 이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첫 번째 봉오리인 당산은 오색 천을 나뭇가지 사이에 엮어놓은 익숙한 풍경이 여전하다.

아마도 지역 주민들이 어떤 기념일에 제사를 지내는 듯하다.


마을 주민들이 두 손을 모으고, 무당 같은 이들의 징과 장고로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저 노랗고 빨갛게 물들인 천들 사이로 조상이나 특정 영혼들이 스며들었다가 갔으려나 싶다.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전통이고, 사람들의 염원을 담았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지나친다.  

소나무와 서어나무 등이 울창한 능선 길에 접어들며 과거의 기억이 소환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산에 올 때마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외치다가.... 이내 목소리로 뱄어내곤 했다.


언젠가는 진짜로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 나에게 펼쳐질 거란 나만의 믿음으로 큰 소리로 외쳐대며 국사봉과 호룡곡산을 다녀왔다.


그날들과 오늘은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은 온갖 좌절과 고통을 잘 견디고, 마침내 승진 시험에 통과한 지 2년이 넘었다.


두 번째는 근로자들의 아우성과 험한 말들로 가득 찼던 교육청이 아닌 학교에서 근무하며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예전처럼 스트레스를 풀러 온 산행이 아니다.


무엇보다 크게 다른 점은 무의도에서 처음으로 하는 맨발 산행이다.

정말 감사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또 해본다.


큰 무리 마을 배터에서 국사봉까지의 산행 길은 3km다.

쉼 없이 천천히 걸어서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어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원점으로 회귀했다.

아마 신발을 신었다면 달음박질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낙엽과 소나무 이파리들로 뒤섞인 등산로는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편으로는 찬바람이 쌩쌩 불어 대지만, 멀리 있는 섬과 바닷물의 푸르른 풍경이 선명해 보이는 것은 겨울산의 묘미다.


돌이나 나뭇가지 또는 아카시아 같은 가시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양손에 스틱을 잡고서 걷다 보니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산행을 마치고 자전거가 있는 배터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차가운 바닷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은 어렵고 힘겨운 것들을 즐기고, 때로는 이런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이 나일까?

어여튼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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