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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정 Jun 14. 2024

지리산 곰과 마주하다

지리산, 

3~4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3~4회씩 다녔다.


재작년 성중 무박 종주 이후, 

패닉 상태를 경험한 이후부터 장거리 무박 산행은 자제를 하는 중이다.

(산악회 따라 당일 무박 종주, 24시경 영종도 도착 후 방향 감각 상실, 아내를 호출하여 귀가)

 

이번에는 뱀사골 차 박 야영과 연하천 대피소를 예약했다.

느긋한 산행을 준비한 것이다.


첫날, 13시경 영종도를 출발, 

무려 5시간 넘게 운전하여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 차 박 야영지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 사이에 

텐트를 치고 1박을 했다.


물론, 삼겹살과 소맥 한 잔을 곁들였고, 계곡의 물소리와 새들의 노래가 뒤섞인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편안함과 여유가 넘쳤다.


다음 날 아침, 뱀사골 계곡과 반야봉을 맨발로 다녀오고 싶어서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슬에 젖은 텐트를 햇볕에 말리고

누룽지 등으로 가벼운 아침을 먹자마자 짐들을 정리했다.


하산 후 차에서 잘 요량으로 잠자리 준비까지 마쳤고,

이어서 산행을 시작했다.


와운마을 입구까지 2km 정도는 신발을 신은 채 걸었고, 

이후는 신발을 벗었다.


곰!

곰에 대한 알림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새끼 곰을 마주했을 때 주의사항 등도 있는데,

주요 내용은 '먹이를 주거나 가까이하지 말아라, 주변에 어미 곰이 있다' 등등


표지판을 대할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고, 

화개재, 삼각봉, 반야봉까지 무사히 올랐다.


편도 12km, 6시간의 맨발 산행은 반야봉에서 마무리했다.

사진도 찍고, 간식과 물을 마셨다.


10여분 쉬면서, 발을 씻고 양말과 신발을 장착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반야봉 아래 200m 지점쯤이었을까.

등산로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새끼 곰이 숲 속으로 지나쳐 간다.

 

'이크, 곰이다!, 이게 뭔 상황이지?' 라며 약간 놀랐고,

'이곳을 빨리 벗어나자'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바쁜 마음으로 반야봉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삼각봉 방향으로 접어들었는데,

오른쪽 스틱을 짚는 고정점이 돌덩이 사이에서 엉켰다.


즉, 스틱이 안착되지 않은 채, 몸무게가 앞쪽으로 쏠렸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고, 넘어지고 말았다.


정말, 다행인 점은 큰 돌들 사이에서 머리를 부딪치지 않았고,

오른팔로 살짝 지지하면서 한 바퀴를 굴렀다.

 

그러나 오른쪽 팔과 오른쪽 무릎이 

거친 돌덩이에 닿았다.


'내가 왜 이러지?'

30년 산행 경험 중 처음으로 와장창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란스러웠다.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중상 여부 확인,

'아, 다행이다. 중상은 아니다' 


이어서 '다리에 힘이 빠져서 넘어진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간식을 먹고, 물도 마셨다.


무르팍을 살펴보니 상처는 심하다.

상처 부위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핏방울이 솟아오른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며 했던 행동들이 생각났다.

어떤 날은 고운 흙을 상처에 뿌렸다. 또 어떤 날은 쑥 잎을 버무려서 상처에 붙였다.


그러고 나면, 금세 지혈이 되곤 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말도 안 된다.'라며, 출발했다.


'평소처럼 음악을 틀고 가자!, 왜 정상에서 그냥 내려왔지?'

스마트폰에서 노랫소리가 퍼지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등산 중 노랫소리는 내가 듣기도 하지만, 

곰이나 멧돼지 같은 동물들이 나를 피하도록 하는 목적도 컸다.


그래서 혼자 만의 산행 길에서는 언제나 음악을 크게 틀고 다녔다. 

오늘은 반야봉의 아름다운 풍경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음악에 대한 생각을 잠깐 잃어버렸다.


'아마 삼각봉에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구든지 도움을 요청하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삼각봉에는 사진을 찍느라 머무르는 이가 있다.


나보다 나이가 살짝 들어 보이는 부부였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연하천 방향 등산로를 묻길래 답변도 드렸다. 


"약 종류 같은 걸 갖고 계시나요? 오는 길에 넘어졌고, 상처가 좀 났습니다. 

평소에는 구급약을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은 주목적이 차 박 인지라, 약들을 차에 놓고 왔네요"라고 설명드렸다.


다행히 후시딘 연고와 밴드 석 장을 얻을 수 있었고, 즉시 바르고 붙였다. 지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4시간에 걸쳐 하산했다.


오늘의 산행에서 느낀 바가 여럿이다.

첫째, 사고는 산행 경험이나 경력의 장단과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위급 상황에서는 초연하고,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셋째, 사고는 하산 길에서 주로 난다. 하산 시 더욱 조심한다.

넷째, 등산 중에는 구급약품을 반드시 지닌다. 

다섯째, 사고가 나면, 주변인에게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상단 사진은 올라가면서 들르지 못한 와운마을이다.

무릎 상처가 다소 걱정은 되었지만, 다시 오기 힘들 거란 생각 때문에 다녀왔다.


오백 년이 넘은 우람한 소나무 두 그루에서 찬란한 기상을 엿보았고,

마을 입구의 부부 소나무도 이색적이었다.


차 박지에서 내가 가진 구급약품 상자를 열어보니

소독제와 붕대 등이 있었다.


상처 처치 후, 저녁밥을 챙겨 먹고 나니 21시가 넘어섰다.

반선 마을까지 산보 겸 해서 갔는데, 마트가 열려 있다.


맥주 두 켄과 소주 한 병을 샀다.

야영지 벤치에 앉아서 별을 안주 삼아, 소맥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내일부터 예정했던 지리산 종주는 포기한다. 

이렇게 다친 상황에서 또 산에 간다는 것은 무모하다'라는 결론이다.


다음날 아침,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병원(의원)에 들러 상처를 치료하고, 파상풍 예방 접종도 맞았다.


이렇게 이번 해의 지리산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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