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업체에서 들여온 학생용 복사기 한 대가 후관동 4층에 설치되어 있다.
교무실 등에서 운영하는 복사기와 달리, 토너와 복사용지 등을 학교에서 관리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사용할 때 비용을 지불하고, 그 비용은 업체의 수익이 된다.
업체 주장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총매출액이 달랑 29만 원이란다.
그래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단다.
이야기를 듣고 즉시 교장선생님에게 협의를 드렸다.
"학생들의 사용량이 저조하여 운영할 수 없다는데, 현재로서 학교의 대책이 없으니 일단 철거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말씀 중에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학교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복사기가 여러 곳에 있고, 학생들의 요구로 진행한 사업의 특성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 예산 사정상 복사기 운영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향후 예산을 편성해서라도 지원했으면 좋겠습니다. 학생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교장선생님은 단호한 의사표명을 하신다.
"학생들의 복사기 사용 무상 지원에 대해 법령이나 관련된 규정이 있을까요? 없다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왠지 나와 입장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정실장이 해야 할 말을 교장이 하고, 교장이 해야 할 말씀을 내가 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법적 근거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얼렁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랜 교육행정 업무 경험을 통하여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라고 생각한다.
교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행정실에서 계장님과 잠깐 논의를 했었다.
내 생각을 접한 계장님이 가장 먼저 말했던 부분이 '예산 낭비 우려'였다.
"무상 지원을 하면, 학생들이 무분별하게 이용할 것이며, 교육적 목적이 아닌 사적 사용이 크게 증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학교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학교는 학생들의 직간접적인 교육활동을 펼치고, 특히 행정실은 배움 활동의 장을 펼치는 학습 여건 조성이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육활동의 지원 범위가 고등학교에서도 최근 대폭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학습용 교구에서 수업료 면제, 교과서는 물론이고 교복과 체육복 등의 무상지급, 심지어 급식까지도 무상 지원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복사기 무상 사용도 불가능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장님이나 교장선생님의 견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의 재정으로 보면 교수활동 지원 만으로도 빠듯하다.
학생들에게 무상 복사기 제공으로 인해 그 용도가 교육적 목적에서 벗어나거나 사적 이용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진취적으로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장실을 나온 후, 당초 사업을 시작했던 담당 교사에게 복사기 철거 상황을 설명드리라고 행정계장님께 말씀드렸다.
학생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안이라 아무래도 미리 양해를 구하는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현재는 관련 업무를 하지 않던 당시의 담당교사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학교 예산 문제를 설명하자, 바로 수긍했다.
현재와 앞으로도 관련 업무를 담당할 행복자치부장님은 견해가 달랐다.
요약하면, '학기를 마쳐가는 현재 시점에서 추가 조치는 어렵다. 일단 철거하자. 그러나 내년도 행복자치부 사업비가 교부되면 관련 예산 편성을 검토하겠다. 학생들의 요구로 만들어졌고, 일부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사업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별도의 목적사업비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계신다.
"이래서 우리 학교의 혁신과 변혁이 이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형식, 시간, 절차 등을 따지지 않고, 활발한 논의와 설명을 이어간다.
관련되신 분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합리적인 방향을 찾아가고, 생각지도 못한 대안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우리 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