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윈드 Oct 22. 2022

한여름의 인사동 그리고 마음의 꽃

흰 구름이 파란 하늘에서 몰려다니고 강렬한 햇살이 뜨겁게 내려 쪼이는 칠월의 어느 날입니다. 한여름이니 무더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덥기는 덥네요. 그런데 무더위 속에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연못가의 꽃댕강나무에서는 연노랑의 꽃봉오리가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군요. 맑은 느낌의 하얀 꽃에서는 음악 대신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옵니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 인사동에도 습기가 배어있는 뜨거운 공기가 가득합니다. 가능한 그늘 쪽으로 천천히 걸어보는데 어느 표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래전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이념을 달리하던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맹을 맺었군요. 길 건너편으로 운현궁이 눈에 들어옵니다. 잠시 격랑에 휩쓸렸던 근대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또 다른 표지석에는 독립선언문배부터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땅에 있는 표지석에도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들이 땅바닥에 있군요! 그 이름들을 딛고 우리가 서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일까요?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뜨거운 햇살과 함께 한껏 달구어진 공기가 훅하고 들어오는데 잠시 구름에 그늘이 지기도 합니다. 이런 날씨에도 담장 아래 서있는 무인석은 그저 담담한 표정입니다. 기와지붕 위로 구름은 흘러가고 육중한 느낌의 무인석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느 능을 지키던 시절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길가에는 산앵두가 익어갑니다. 아직 노란 열매에 뜨거운 햇살이 스며들며 붉어지네요. 왠지 느긋하게 익어가는 듯합니다.      


독특한 모습의 석등이 눈에 띕니다. 이 문인은 비록 무겁지만 머리에 불을 밝혀 세상을 비추고 싶은 것일까요? 문득 그리스 신전의  카리아티드가 생각납니다. 그녀들은 온몸으로 신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고 이 문인은 석등을 받치고 있네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한 친구와 경인미술관에 들립니다. 이곳에는 초록이 가득하네요. 기와지붕 앞에는 커다란 모과나무가 초록 잎을 자랑합니다.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에도 초록 잎이 달려있습니다. 지난겨울 동안 말라버린 줄기의 흔적이 남아있어 벌써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네요. 조금씩 삭아가는 기와지붕 위에도 초록이 덮여 있습니다. 식물들은 참으로 강인하네요.     


친구와 함께 전시를 보기로 합니다. 어느 작가의 서예작품 중에 '一切唯心'이 눈에 들어옵니다. 글씨도 멋지지만 잠시 그 의미를 새겨보게 됩니다. 세상은 존재하겠지만 그것을 인식함으로 나의 세계가 되는 듯도 합니다. 또 다른 전시장에서 멋진 펜 그림도 봅니다. 펜만으로 거대한 원시림을 그린 정성 또한 대단하네요. 마지막으로 민화전도 관람합니다. 책가도를 보며 선비의 사랑방을 상상하고 모란을 보며 선덕여왕 이야기도 나누어봅니다. 그런데 이층 창문 밖에는 초록이 가득하네요. 자연의 모습을 네모난 창틀 너머로 바라보니 그대로 작품이 되는 듯합니다.     


오래전에 어느 전시에서 본 책가도를 꺼내봅니다. 선비의 사랑방을 장식한 책가도에 수선화가 피어있습니다. 비록 접시에 알뿌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곱게 자라 꽃을 활짝 피었군요. 어쩌면 책을 읽은 선비의 마음에도 맑은 꽃이 피어났을 듯합니다.        


     

자주 가는 한옥 음식점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서로 권하는 막걸리는 시원하고 웃음소리는 커져갑니다. 나누는 이야기 속에 얼굴은 점점 꽃처럼 붉어지고 마음도 뜨거워집니다. 당연히 과거에도 사람 사는 즐거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대가 좋았으면 조금 더 편안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힘이 들었겠지만요.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희망도 잃지 않았을 것이고요.      


책가도 병풍이 놓여있는 어느 사랑방에는 시대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누구는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결의를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은 꽃보다 아름답고 그들의 결의는 열매처럼 붉게 익어갔을 듯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취는 꽃보다 더 향기로운 듯합니다. 유서 깊은 동네 인사동에서 막걸리와 함께 우정을 나누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이전 14화 '죄와 벌'의 에필로그를 다시 읽으며 봄을 기다리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