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인지 봄에는 비가 자주 오는 느낌입니다. 무럭무럭 커가는 식물들에게 빗물이 필요하기 때문일까요? 오늘도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합니다. 하지만 습기가 가득하여 더욱 상쾌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안단테로 느리게 걸어봅니다. 올 해에는 다시 못 볼 오월의 풀숲은 신선하기만 하니까요.
풀숲의 연두색의 이끼에는 물기가 촉촉합니다. 미안함을 느끼며 잠시 걸어보니 폭신폭신하네요. 군데군데 피어있는 뱀딸기의 노란 꽃에서는 새근새근 한 숨소리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다섯 장의 노란 꽃잎이 활짝 펼쳐져 있는데 꽃술마저 노란 꽃이 활짝 웃는 듯합니다.
길가의 바위틈에는 별 모양의 노란 꽃이 피어납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있으니 마치 땅에서 노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왜 기린초라고 부를까요? 어느 누구는 멋진 동물인 기린을 닮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옆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자주달개비 꽃이 산뜻합니다. 자세히 보니 노란 꽃밥 아래에는 자주색 솜털이 보송보송하네요.
며칠 전에 처음 본 자엽 양국수나무의 꽃도 다시 봅니다. 하얀 꽃 안에서 튀어나오는 꽃술 끝의 진분홍 꽃밥이 산뜻합니다. 꽃봉오리가 연한 분홍색이더니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 만첩 빈도리는 바깥쪽의 꽃잎에 아직 분홍빛이 남아있군요. 바람이 살짝 부니 왠지 하와이의 훌라춤이 생각납니다.
높은 바위틈에서는 노란 고들빼기 꽃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래로 늘어진 모습이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꽃은 활짝 피어납니다. 햇빛과 빗물만 있으면 어디서나 잘 자라고 꽃을 피우는 고들빼기군요. 남정목의 하얀 꽃봉오리들이 이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향기를 맡고 싶었는데 거센 바람이 실어가 버리고 마네요. 이제 점점 많이 피어날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아주 작은 보랏빛 꽃이 피던 얼치기완두의 씨방이 벌써 커가는군요. 문득 르네 마그리트의 골콩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름이 얼치기완두인 것은 완두콩을 닮았는데 먹지 못해서 이렇게 불렀을 듯합니다.
문득 인류가 처음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을 먹어보고 그중에서 맛있는 어떤 식물을 기르기로 결정했을 듯합니다. 어떤 식물은 약으로도 사용하고요. 그런 여러 식물마다 가장 우수한 품종의 씨앗을 해를 거듭하며 재배해 왔을 듯합니다. 그렇게 야생식물과 작물이 달라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며 옆을 보니 이름 모를 풀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왠지 호밀을 닮은 듯도 한데 아주 작은 꽃도 피어있네요. 어쩌면 호밀이나 밀의 먼 친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왠지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재배를 시도해 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람에 산들거리는 긴 수염도 멋지네요. 그런데 뒤쪽의 개망초 꽃이 산책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군요.
갑자기 이슬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안개가 퍼져오듯 내리는 작은 빗방울에 금방 옷이 젖어옵니다.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농사를 짓기 시작하던 신석기인들을 마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수많은 식물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먹어보고 그중에서 맛 좋고 영양 많은 작물들을 재배해 왔을 듯합니다. 그래서 야생의 식물들은 밀이 되고 보리가 되고 또 쌀이 되었겠지요. 또한 수많은 채소와 과일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고대 문명은 그 지역에 운 좋게 야생 밀이 있어 시작되었다고도 하더군요.
농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시간이 증가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채집 경제 시절에는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해도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잉여농산물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그렇다고 누군가 맨 처음 작물을 기르기 시작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역사는 이미 그렇게 흘러왔으니까요. 그런데 신석기인들은 비가 와도 일을 했겠지요? 아마도 비가 오는 봄날이면 더 바빠졌을 듯도 합니다.
생각을 멈추고 내리는 이슬비를 보며 헨델의 하프 협주곡 1악장을 들어봅니다. 창밖은 뽀얗게 흐려지지만 맑은 빗물이 떨어지는 듯한 경쾌한 리듬에 마음이 밝아집니다. 뜨거운 커피는 더욱 맛있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