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나의성격

나의 인생 회고

by 지율


나는 천성이 느린것 같다.

똑똑한 머리나 타고난 재능은 나와는 거리가 먼 능력들 인것같다.


그래서, 남들보다 모든것이 느렸다.

어른들의 타박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당당했던것을 돌이켜 보면, 신기하긴 하다.


생존하기 위해 ,나는 선택과 집중을 어렸을때 부터

몸에 익힌것 같다.


그리고 "이왕 할것 제대로"가 지금

나의 신념과 가치관들에

뿌리깊게 새겨진것 같다.


나는 자의로,타의로 다양한 학교를 경험했고,

때론 내가 바라는 신념대로,최선을 다하여,

때론 점수에 맞추어 학교를 다니며, 시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나는 평가가 늘 양극단에 존재 했었던것 같다.


만27세, 생일이 지나지 않은 29살 짧은인생

불행도 경험했고, 그 끝에 장애와 닫힌 형태의

장애 사회에 노력을 해도 적응을 하기 힘들었다.


하고자 마음 먹으면 꼭 해내는 나를 장애 이후로,

망가뜨리기 쉬운 일 이였다.





Small step을 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는

나는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해결 될때까지

최선을 다한것 인지 재능이 있었던것 아니였다.


나의 성격은 양날의 검인것 같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던것 같다.



관심 없는 일이나 ,최선을 다하고 변화가 없으면

나는 장애를 얻기 전에는, 관심 없는 일은 시작도 안했다.

그때, 나는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무심했고, 지극히 개인적 이였다.


피해를 주는것도 죽을만큼 싫었지만,

피해 받는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예민하다. 묵묵하다.

냉혹하다는 평가를 살았던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가망이 없는것은

누구보다 빠른 포기를 하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기계와 컴퓨터 그리고 모바일이 도처에 깔려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타고난 환경이 비교적 좋았던것 같다.

그래서,그저 끝까지 오래하는 내게 배우는것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다.






S기업이 부천에서 반도체의 한 부분인,

전구 필라멘트 만들때부터,

평택 고덕으로 갈때까지 나의 부친은

s기업 에서 장기간 근무하셨고, 주재원 생활을 오래하셨음에도

회사 연구실 이동에 따라,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했다.


남들은 부러워할 우리집만의 특징이 있었다.

아버지만의 기계를 해체하고,조립하고설계도 대로 만들어 보고,

그것을 도와줄 도구들과 컴퓨터들만 있는 방이,

다른집 서재 처럼 있었다. 나는 모든 집이 그런줄 알고 컸다.


컴퓨터, 기계들,설계도,연구실 에서나 볼법한 것들

늘 Dos화면이 떠져있는 컴퓨터들

나의 아버지는 메모리 반도체 1~1.5세대 이기도 하셨고,

특허 관련 전문직으로 s기업 기술연구 책임자 이셨다.


여러가지 사내 정치로 인하여 좌천되어, 한직에 가셔서,

퇴사 하실때까지, 아버지는

일본,독일,러시아,미국,연구실들을 수시로 돌아 다니셨다.

1년에 2,3주 보는일이 허다 했다.


그는 가족의 체류비를 절약하는 안을 내고,

고정적으로 해당국 법인

주재원 생활과 연구연수 그리고 면허증과 학위등을 경험하셨다.


청소년기,청년기 지금까지도

그가 s기업 이란, 종교에 미쳐, 기술을 헌납하는

광신도 라는 지점이 나를 지금도 불편하게 만든다.




이러한 환경에서,아이러니 한것은 ,

나는 아직 디지털도 IT도 어색했다.


행정부처와 관련된 정무직 공무원이나 의약계열 교수님들이

대부분 이였던 외가에서 어린시절 , 대부분을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엄청난 부를 가진것도,서울에 살았던것도

아닌데, 공부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환경이였고,

그 기회들을 인정하고, 원망스러운 부분과 감사할 부분은

늘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부족한사람이다보니,

치우친 편견을 종종 표현 한다.


나는 내가 닮고 싶은 외숙의

직업이 그냥 멋졌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6살때 부터 만20세 까지 장래희망은 한결 같았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평행선이였던것은 확실했다.

5분이상 길게 진지할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 모두 놀러간 기억이 없다.


중학생때 부터 1년 대부분을 같이 살던

시간부터 우리 가족 모두 위태로웠다.


회사에 가까운 곳 으로 이사를 다니시면서,

아침, 점심,저녁 모두 집에서

식사 하시고, 어머니의 외부인을 만나는것 자체를

제한 하셨던 아버지는 외부평가는 좋을수 있지만,

가족에게 폭군 그자체 였다.


절대로 폭행하지 않으셨지만,

친가,외가 가족 모두 아버지의 통제 바운더리에 들어와야하고,

그것이 당연하자 모두 여기게 하셨다.


어느 순간 부터는, 나는 포기하신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기계와 공학 그리고게임등과

거리를 두었던것 같다.


그것이 학습에 도움이 된것일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한자,한문을 초등학교 6학년때 까지 꾸준히 했고,

1급을 공부하고, 사서 오경에 관심을 가졌던것 같다.

이것은 나에게 매번 큰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암기력이 좋겠다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타고난 암기력 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축구 ,물에서 하는 대부분의 운동 ,학교공부

그리고 한자,한문만 해서,그것만 잘한것 같다.

지금 생각 해보면, 나의 10대는 운이 매우 좋았던것 같다.

그것만 하니,많이 해서 잘했던것인데, 늘 포장 되었던것 같다.

나도 모두 내 능력이라 여겼다.

이것이 아님을 인지 하고, 인정하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에 트라우마로 깊게 박혀있는 공부가 있다.

영어는 익숙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횟수를 도전하고,

가장 많은 시간의 각종 노력을 들여도 늘 공포의 대상 이였다.


아버지와 제대로된 대화를 나눈 횟수는 손에 꼽고,

같이 놀아본적이 없다. 그는 일 중독자 였다.


어린시절 정치근 교수님이 쓴 노란색

영문법 책을 외우게 했다. 그두께와 글자크기는 대법전과

견주어도 절대로 지지 않을것 이다.


1년중에 , 2,3주 오는 시간은 평가의 시간이였다.

공포였다.


영어가 아닌 영문학 에서 배울법한

영어 문법학에 7,8세경에 나는 질려 버렸다.

다행히 부끄러운 점수는 아니였지만, 한자를 이용하는

제대로 배워보지 않은 언어들에게 더 끌리는것은 사실 이였다.


아직 아버지의 육아,교육,가장으로 가족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 이후로, 영단어,숙어를 유독 잘 못 외웠다.

문맥을 보는 기술이 쌓인것도 그 이유가 큰것 같다.


늘 속했던 집단에서 영어를 못하는것은 아니였고,

영어 논문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적은 없지만,

영어는 내게 늘 공포의 대상 이였고, 외국인과 일상을 소통한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장이 늘 길어지는 악습,내주장 말하기도

급한 상황들이 빈번하게 생겼다.

토론을 할때, 나쁘지는 않았지만,

토의와 듣기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 입시 영어의 끝판왕 이였다.



장애를 가지게 된 지금도,

해당국 외국인 친구도 많이 없는데 영어보다

일어,중국어,광동어가 말은 못해도 독해나 듣기는

더 편했다.실질적인 실력도 영어가 훨씬 앞서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영어가 두렵다.


정확히는 제대로 배워보지 않아서,

구어체에 어색한것은 당연하고, 한국인이 어려워하는

모든 발음을 당연히 못했다.

하지만, 영어보다 못해도 영어보다 즐거웠다.


이번 small step 중 큰 계획 하나는 영어듣기와 구어체에

익숙해지고,

내가 할줄 아는 외국어는 발음부터 기본을 다시금 다지고,

마찬가지로 구어체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트라우마에 벗어나기 위한 나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장애로 된 장해들의 현상유지 ,

후유증 진행 최소화

즉, 건강 그것을 위한, 체중 조절, 약들로 인하여, 현저히 줄어든

기초대사량을 늘릴 목적으로 만보를 꾸준히 걷는것을 루틴중 하나로정한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선택한것은 시각장애인 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그것은 흰지팡이 안정적 보행과 점자 익히기다.


나의 최선의 노력과 관련없이 노화는 현재 진행중 이고,

그에 따른,노안은 그런 내게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수 밖에 없다.

그때 무너지지 않게 노력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낀다.


그다음이 외국어,언어 이다.

왜냐하면, 외국어는 말하고,듣기만 편하게 소통이 가능하고

그언어를 편하게 사용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하면,

나에게 분명,수많은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은 20대의 파란만장함이

느끼게 해줬고,확신으로 다가왔다.


문법 보다는 어순감각과 상황에 따른 대화를 통해,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 문화를 이해하고,소통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알고, 그들에 장점을 배우고 싶다면,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는것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주치상,안전의무와 구조의무 위반 사고로, 장애들을 얻고,

다른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현실적인 능력을 쌓고싶다.

일을 한다고 해도, 많은 비용을 인건비와 이동비로

거의 다 사용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꾸준히 해오던 일은 오래하기 힘든것을 안다.

그래서,나는 절실하게 나에게패널티를 작용하는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일의 형태를 바꿀 일들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이 외국 언어 이다




내가 이것들을 해보고 싶은 이유중

가장 큰것은 어린 시각 장애우들이 성장했을때, 더 좋은 기계가

나온다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전공 논문을 접하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눈이 조금이라도 더 보일때 이일은 꼭 해내야 겠다 생각하고,

학문은 영어,독일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어는 번역 공공기관이 일본어로 번역을 지독할정도로 한다.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선진화된 제도를 우리 시각장애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기회조차 읽는다.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해야 행동을 하고,

행동하다보면 의지가 생기고,

그것이 이어지다 보면 삶이 된다는 확신을,

죽밥 프로젝트로 small step을 루틴으로 순간을 쌓아가며

느끼고,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된 영구장해는 아직 현대의학과 임상정도와 절차를

봤을때, 현실적으로 회복이 불가능 하다.

장애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 있다고 해서,

한 인격체, 지식인, 사회인으로써 자격이 박탈 되는것이 아니다.


권리는 절대로 쉬이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와 조금은 다른 일반인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는 해당 분야 지식과 경험이 충분해야 한다.






기회적 평등도 헌법상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환경 즉, 인프라 구축과 확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적 평등을 위한 무한정한 세금 지출의 이자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어린친구들에 몫이다.


나는 전국적인 인프라 형성이 최우선이라 확신한다.



의외로 나는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사상가 이거나 정치가 이거나 선동가는 아니다.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자본주의와 헌법에 따른 법치주의가 균형을 이루며,

민주 공화정 안에서 올바르게 내일을 비약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한반도 첫 민주 공화정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이뜻이 단, 한순간도 바뀐적 없고, 바뀔 마음이 없으니 진정한 의미에

보수주의 시민 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모든순간 스스로 에게 당당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장애를 얻었지만,

힘들게 내가 배우고, 글을 읽고, 쓰는것을 알아야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Small step은 내가 틀리지 않음을 혹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경험하고, 확신할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나의 회고를 쓴 이유는, 내가 무너진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먼 시점부터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사실에 대한, 확신을 아직도 힘들고,

괴로운 시각장애와 PTSD등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은

Small step의 무기이기도 하고, 이것을 끝까지 끌고 나가고 싶다.

최소한 2,3년 동안은 보폭을 줄이기도 넓히 기도 하면서 꾸준히

루틴들로 순간을 쌓아가고 싶다.


증상과 그에따른, 기분은 어쩔수 없다.

나의 삶의 질이 널뛰기 하듯이, 변동폭이 큰것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서 작은 루틴들로 순간을 쌓아가는 노력들이

도와줄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천성이 느린것 같다.

똑똑한 머리나 타고난 재능은 나와는 거리가 먼 능력들 인것같다.


그래서, 남들보다 모든것이 느렸다.

어른들의 타박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당당했던것을 돌이켜 보면, 신기하긴 하다.


생존하기 위해 ,나는 선택과 집중을 어렸을때 부터

몸에 익힌것 같다.


그리고 "이왕 할것 제대로"가 지금

나의 신념과 가치관들에

뿌리깊게 새겨진것 같다.


나는 자의로,타의로 다양한 학교를 경험했고,

때론 내가 바라는 신념대로,최선을 다하여,

때론 점수에 맞추어 학교를 다니며, 시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나는 평가가 늘 양극단에 존재 했었던것 같다.


만27세, 생일이 지나지 않은 29살 짧은인생

불행도 경험했고, 그 끝에 장애와 닫힌 형태의

장애 사회에 노력을 해도 적응을 하기 힘들었다.


하고자 마음 먹으면 꼭 해내는 나를 장애 이후로,

망가뜨리기 쉬운 일 이였다.





Small step을 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는

나는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해결 될때까지

최선을 다한것 인지 재능이 있었던것 아니였다.


나의 성격은 양날의 검인것 같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던것 같다.



관심 없는 일이나 ,최선을 다하고 변화가 없으면

나는 장애를 얻기 전에는, 관심 없는 일은 시작도 안했다.

그때, 나는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무심했고, 지극히 개인적 이였다.


피해를 주는것도 죽을만큼 싫었지만,

피해 받는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예민하다. 묵묵하다.

냉혹하다는 평가를 살았던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가망이 없는것은

누구보다 빠른 포기를 하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기계와 컴퓨터 그리고 모바일이 도처에 깔려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타고난 환경이 비교적 좋았던것 같다.

그래서,그저 끝까지 오래하는 내게 배우는것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다.






S기업이 부천에서 반도체의 한 부분인,

전구 필라멘트 만들때부터,

평택 고덕으로 갈때까지 나의 부친은

s기업 에서 장기간 근무하셨고, 주재원 생활을 오래하셨음에도

회사 연구실 이동에 따라,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했다.


남들은 부러워할 우리집만의 특징이 있었다.

아버지만의 기계를 해체하고,조립하고설계도 대로 만들어 보고,

그것을 도와줄 도구들과 컴퓨터들만 있는 방이,

다른집 서재 처럼 있었다. 나는 모든 집이 그런줄 알고 컸다.


컴퓨터, 기계들,설계도,연구실 에서나 볼법한 것들

늘 Dos화면이 떠져있는 컴퓨터들

나의 아버지는 메모리 반도체 1~1.5세대 이기도 하셨고,

특허 관련 전문직으로 s기업 기술연구 책임자 이셨다.


여러가지 사내 정치로 인하여 좌천되어, 한직에 가셔서,

퇴사 하실때까지, 아버지는

일본,독일,러시아,미국,연구실들을 수시로 돌아 다니셨다.

1년에 2,3주 보는일이 허다 했다.


그는 가족의 체류비를 절약하는 안을 내고,

고정적으로 해당국 법인

주재원 생활과 연구연수 그리고 면허증과 학위등을 경험하셨다.


청소년기,청년기 지금까지도

그가 s기업 이란, 종교에 미쳐, 기술을 헌납하는

광신도 라는 지점이 나를 지금도 불편하게 만든다.




이러한 환경에서,아이러니 한것은 ,

나는 아직 디지털도 IT도 어색했다.


행정부처와 관련된 정무직 공무원이나 의약계열 교수님들이

대부분 이였던 외가에서 어린시절 , 대부분을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엄청난 부를 가진것도,서울에 살았던것도

아닌데, 공부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환경이였고,

그 기회들을 인정하고, 원망스러운 부분과 감사할 부분은

늘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부족한사람이다보니,

치우친 편견을 종종 표현 한다.


나는 내가 닮고 싶은 외숙의

직업이 그냥 멋졌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6살때 부터 만20세 까지 장래희망은 한결 같았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평행선이였던것은 확실했다.

5분이상 길게 진지할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 모두 놀러간 기억이 없다.


중학생때 부터 1년 대부분을 같이 살던

시간부터 우리 가족 모두 위태로웠다.


회사에 가까운 곳 으로 이사를 다니시면서,

아침, 점심,저녁 모두 집에서

식사 하시고, 어머니의 외부인을 만나는것 자체를

제한 하셨던 아버지는 외부평가는 좋을수 있지만,

가족에게 폭군 그자체 였다.


절대로 폭행하지 않으셨지만,

친가,외가 가족 모두 아버지의 통제 바운더리에 들어와야하고,

그것이 당연하자 모두 여기게 하셨다.


어느 순간 부터는, 나는 포기하신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기계와 공학 그리고게임등과

거리를 두었던것 같다.


그것이 학습에 도움이 된것일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한자,한문을 초등학교 6학년때 까지 꾸준히 했고,

1급을 공부하고, 사서 오경에 관심을 가졌던것 같다.

이것은 나에게 매번 큰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암기력이 좋겠다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타고난 암기력 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축구 ,물에서 하는 대부분의 운동 ,학교공부

그리고 한자,한문만 해서,그것만 잘한것 같다.

지금 생각 해보면, 나의 10대는 운이 매우 좋았던것 같다.

그것만 하니,많이 해서 잘했던것인데, 늘 포장 되었던것 같다.

나도 모두 내 능력이라 여겼다.

이것이 아님을 인지 하고, 인정하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에 트라우마로 깊게 박혀있는 공부가 있다.

영어는 익숙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횟수를 도전하고,

가장 많은 시간의 각종 노력을 들여도 늘 공포의 대상 이였다.


아버지와 제대로된 대화를 나눈 횟수는 손에 꼽고,

같이 놀아본적이 없다. 그는 일 중독자 였다.


어린시절 정치근 교수님이 쓴 노란색

영문법 책을 외우게 했다. 그두께와 글자크기는 대법전과

견주어도 절대로 지지 않을것 이다.


1년중에 , 2,3주 오는 시간은 평가의 시간이였다.

공포였다.


영어가 아닌 영문학 에서 배울법한

영어 문법학에 7,8세경에 나는 질려 버렸다.

다행히 부끄러운 점수는 아니였지만, 한자를 이용하는

제대로 배워보지 않은 언어들에게 더 끌리는것은 사실 이였다.


아직 아버지의 육아,교육,가장으로 가족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 이후로, 영단어,숙어를 유독 잘 못 외웠다.

문맥을 보는 기술이 쌓인것도 그 이유가 큰것 같다.


늘 속했던 집단에서 영어를 못하는것은 아니였고,

영어 논문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적은 없지만,

영어는 내게 늘 공포의 대상 이였고, 외국인과 일상을 소통한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장이 늘 길어지는 악습,내주장 말하기도

급한 상황들이 빈번하게 생겼다.

토론을 할때, 나쁘지는 않았지만,

토의와 듣기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 입시 영어의 끝판왕 이였다.



장애를 가지게 된 지금도,

해당국 외국인 친구도 많이 없는데 영어보다

일어,중국어,광동어가 말은 못해도 독해나 듣기는

더 편했다.실질적인 실력도 영어가 훨씬 앞서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영어가 두렵다.


정확히는 제대로 배워보지 않아서,

구어체에 어색한것은 당연하고, 한국인이 어려워하는

모든 발음을 당연히 못했다.

하지만, 영어보다 못해도 영어보다 즐거웠다.


이번 small step 중 큰 계획 하나는 영어듣기와 구어체에

익숙해지고,

내가 할줄 아는 외국어는 발음부터 기본을 다시금 다지고,

마찬가지로 구어체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트라우마에 벗어나기 위한 나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장애로 된 장해들의 현상유지 ,

후유증 진행 최소화

즉, 건강 그것을 위한, 체중 조절, 약들로 인하여, 현저히 줄어든

기초대사량을 늘릴 목적으로 만보를 꾸준히 걷는것을 루틴중 하나로정한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선택한것은 시각장애인 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그것은 흰지팡이 안정적 보행과 점자 익히기다.


나의 최선의 노력과 관련없이 노화는 현재 진행중 이고,

그에 따른,노안은 그런 내게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수 밖에 없다.

그때 무너지지 않게 노력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낀다.


그다음이 외국어,언어 이다.

왜냐하면, 외국어는 말하고,듣기만 편하게 소통이 가능하고

그언어를 편하게 사용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하면,

나에게 분명,수많은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은 20대의 파란만장함이

느끼게 해줬고,확신으로 다가왔다.


문법 보다는 어순감각과 상황에 따른 대화를 통해,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 문화를 이해하고,소통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알고, 그들에 장점을 배우고 싶다면,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는것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주치상,안전의무와 구조의무 위반 사고로, 장애들을 얻고,

다른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현실적인 능력을 쌓고싶다.

일을 한다고 해도, 많은 비용을 인건비와 이동비로

거의 다 사용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꾸준히 해오던 일은 오래하기 힘든것을 안다.

그래서,나는 절실하게 나에게패널티를 작용하는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일의 형태를 바꿀 일들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이 외국 언어 이다




내가 이것들을 해보고 싶은 이유중

가장 큰것은 어린 시각 장애우들이 성장했을때, 더 좋은 기계가

나온다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전공 논문을 접하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눈이 조금이라도 더 보일때 이일은 꼭 해내야 겠다 생각하고,

학문은 영어,독일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어는 번역 공공기관이 일본어로 번역을 지독할정도로 한다.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선진화된 제도를 우리 시각장애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기회조차 읽는다.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해야 행동을 하고,

행동하다보면 의지가 생기고,

그것이 이어지다 보면 삶이 된다는 확신을,

죽밥 프로젝트로 small step을 루틴으로 순간을 쌓아가며

느끼고,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된 영구장해는 아직 현대의학과 임상정도와 절차를

봤을때, 현실적으로 회복이 불가능 하다.

장애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 있다고 해서,

한 인격체, 지식인, 사회인으로써 자격이 박탈 되는것이 아니다.


권리는 절대로 쉬이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와 조금은 다른 일반인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는 해당 분야 지식과 경험이 충분해야 한다.






기회적 평등도 헌법상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환경 즉, 인프라 구축과 확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적 평등을 위한 무한정한 세금 지출의 이자는

다음세대의 주역인 어린친구들에 몫이다.


나는 전국적인 인프라 형성이 최우선이라 확신한다.



의외로 나는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사상가 이거나 정치가 이거나 선동가는 아니다.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자본주의와 헌법에 따른 법치주의가 균형을 이루며,

민주 공화정 안에서 올바르게 내일을 비약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한반도 첫 민주 공화정 국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이뜻이 단, 한순간도 바뀐적 없고, 바뀔 마음이 없으니 진정한 의미에

보수주의 시민 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모든순간 스스로 에게 당당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장애를 얻었지만,

힘들게 내가 배우고, 글을 읽고, 쓰는것을 알아야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입장과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Small step은 내가 틀리지 않음을 혹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경험하고, 확신할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나의 회고를 쓴 이유는, 내가 무너진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먼 시점부터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합리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사실에 대한, 확신을 아직도 힘들고,

괴로운 시각장애와 PTSD등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은

Small step의 무기이기도 하고, 이것을 끝까지 끌고 나가고 싶다.

최소한 2,3년 동안은 보폭을 줄이기도 넓히 기도 하면서 꾸준히

루틴들로 순간을 쌓아가고 싶다.


증상과 그에따른, 기분은 어쩔수 없다.

나의 삶의 질이 널뛰기 하듯이, 변동폭이 큰것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서 작은 루틴들로 순간을 쌓아가는 노력들이

도와줄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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