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에서 불운은 더 밝게 빛나며 존재감이 드러나는 법이다.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난 아이는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생명이라는 무게감이 느껴졌는지 아빠는 살리고자 했다. 아이를.
현실은 잔혹하다.
지불해야 하는 한낱 종이조각의 양이 늘어날수록 병원에 있어야 하는 엄마와 동생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집에 온 동생은 작은 천보 자기에 쌓여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가난의 법칙은 비켜가지 않는다.
왜 우리 집이어야 했나.
왜 이 작고 작은 아이여야 했을까.
없는 집에 태어난 것도 모자라 정상적인 것을 주지 않았다.
있는 집에 태어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채워줄 수 있을 텐데.
걸을 수 있을까?
힘겹게 분유를 빨고 있는 아이를 할머니는 늘 언짢아했다.
동생이 형의 행운을 가져가고 있다는 것처럼.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고
몸빼 바지 속 사탕하나 건네준 적 없었다.
차별은 고스란히 틈을 만들었고 틈은 벌어져 굴곡이 되었다.
외골수 사랑.
불편한 손이 스스로 젖병을 잡고 먹을 때가 선명하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런 것이다.
아무리 형제가 많아도 아픈 동생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여유는 가난에서 온다.
가난에 맞서 유일하게 승리를 취한 자가 있다면 동생이었다.
포기하라던 말과 달리 살아내 주었고
무엇하나 잡을 수 있을까 했던 손으로 젖병을 쥐었으며
평생 안고 다녀야 할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걸어 다녔다.
그렇게 이겨냈다고 여기려 했건만 동생은 말을 하지 못했다.
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다.
가난은 때를 가져간다.
공부해야 할 때,
치료받아야 할 때,
관심받아야 할 때.
그리고 진실을 보는 때까지.
가난해서 속았다는 말이 핑계라고 할지라도 가난은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고통을 체감할 수 없다.
가난은 통계로 낼 수 있는 수치가 아니라 삶이다.
특수학교를 다녀야 했던 동생이 머물렀던 곳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얼마 못 가서 그곳은 폐교되었다.
가난의 힘을 알겠는가?
믿기 싫어도 가난은 불행을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
폐교된 학교는, 그렇다.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소설 도가니의 학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