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존재하지.
잊지 못할 추억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되곤 한다.
기억의 오류로 간직하고 싶은 추억들만 남길 수 있기도 하고, 단편적인 부분의 기억으로 사건을 확대하기도 한다.
추억을 더듬어보다 날카로운 조각에 손을 베었다.
아, 만지지 말아야 할 조각을 집어버렸구나.
똑 똑, 샘솟는 붉은 핏방울 위로 추억도 조금씩 차오른다.
허락 없이.
선명하고 눈부셨던 노을이 두 볼을 물들일 때 어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전에 도착하겠지.
발걸음을 재촉해도 지나가는 바퀴에 따라 잡히고 말았다.
시간은 쌩쌩 언니와 나를 두고 가버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건 바람이 일으키고 간 먼지바람과 야속한 도로 위 무법자들의 매캐한 연기뿐이었다.
둘 다 잡을 수 없는 것들.
미리 준비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형편에 미리 준비할 수 없었던 승차권이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3명으로 늘어나자 교통비조차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종잇 조가리에 적힌 숫자가 나를 실어 나르는 신용이 되었고, 나의 신용은 불안 불안했다.
그날도 승차권을 구입할 목돈이 없어 현금을 내고 학교에 갔고, 하교하며 언니와 함께 교문을 나왔다.
북적이는 문구점과 분식점은 외딴섬이었다.
어느 섬이길래 그들은 그곳에 머물며 축제를 즐기고 향긋한 냄새를 뿌리는 걸까.
밤을 밝히는 횃불처럼 한 손에 들린 피카츄돈까스는 빨간 소스를 입고 빛나고 있었다.
침이 꼴깍.
마음이 허기졌다.
수중에는 차비로 써야 하는 현금이 주머니에서 울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게 하는 법을 몰라 시선을 올려 어깨 위의 언니를 바라보았고 언니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피카츄 먹을래? 대신 많이 걸어야 해. 정말 많이"
나는 정말의 의미를 몰랐다.
많이는 나에게도 횃불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만 알았다.
나보다 2살 위의 언니도 아마 많이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그저, 동생의 주머니에서 울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을 테다.
단지 언니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맛있게 걸었다.
한입 베어물 때마다 입안에서는 소풍을 떠났다.
우리가 탔어야 할 보라색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콧방귀가 뀌어졌다.
"우리는 소풍 가는 중이야!"
창밖으로 감기던 거리의 풍경을 느리게 재생하며 감상하고 있었다.
다리를 걸을 때에는 강물에 반사되는 투명거울에 행복을 물고 있는 나를 보며 즐거웠다.
언니와 재잘재잘 참새처럼 이야기하며 시간을 날아갔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언니와 나에게는 날개가 없다는 것을.
새처럼 금세 비행하여 여행을 끝낼 수 없었다.
'많은'의 의미가 점차 두 다리의 현실로 다가왔고 줄어드는 거리만큼 속도는 더뎌졌다.
손에 들려있던 횃불은 꺼지고 초라한 나무젓가락만 남아있었다.
아직도 뜨거운 석양빛에 나무젓가락을 가져다 대면 다시 타오를까.
마음을 밝혀줄 수 있을까.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는 언니와 나를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승차권과 바꾼 피카츄 돈까스가 가난이란 조각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찔렀다.
우리는 외딴섬에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석양이 집에 가고 주변이 어두워져도 언니와 나의 두 뺨은 밝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돈이 울고 있어도 다시는 그 울음소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들어줘야 할 소리는 언니가 그날 가졌던 미안함이었고, 앞서 걸으며 보았던 언니의 무게였다.
언니도 어렸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
또 무거웠을까.
추억의 날카로운 조각에 베었을 언니의 손에 약을 발라주기엔 늦었을까.
잊고 싶은 기억은 잊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