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면토끼 Oct 01. 2024

할머니의 곰방대




동백기름, 참빗, 알사탕, 곰방대, 모시옷..




곰방대에 피어오르는 연기 따라 할머니의 얼굴이 가리어진다.


나는 가리어진 연기를 따라 할머니를 기억해 낸다.


가시나, 계집애.


할머니의 언어.


할머니가 입방아에 우리를 올리던 이름이었다.


"가시나가 뭣한다고 먼저 태어나서."


"계집애가 울면 집안이 망하는데 울음 못 그치나!"


동백기름을 손에 묻혀 비비고 그 손으로 곱게 머리를 쓰다듬어 참빗으로 빗는 할머니는 참 고왔다.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삐뚤어짐 없이 가르마를 타서 말아 올린 긴 머리를 비녀로 고정하면 할머니는 달라졌다.


입에 곰방대를 물며 한세월을 자기 앞으로 끌고 와 눈물과 함께 구슬픈 곡조는 한동안 이어졌다.


일찍이 남편을 먼저 보내고 채 슬픔이 가시기도 전 장남도 먼저 보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혼자 가기 쓸쓸해서 아들을 데려갔냐고.


남은 자식들은 할머니의 원망을 먹으며 쓸쓸히 자라야 했다. 


우리 아빠를 포함해서.


아빠가 할머니께 안겨드리는 딸, 딸, 딸...... 또 딸은 서로의 애증관계를 단단하게 굳히고 넓혀갔다.


쓸쓸함을 아빠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빠는 끝까지 아들을 낳으려 했고, 그럴수록 할머니의 한 잔, 두 잔은 늘어만 갔다. 


모시옷 사이로 깊숙이 베여있는 담배냄새와 술냄새는 특유의 향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깊게 파인 세월의 주름은 할머니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상흔이었다.


아빠로는 세월의 주름을 펴드릴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로는 상흔을 지워드릴 수 없었던 것일까?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실 한편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할머니.


이미 쓸쓸함에 취해 피우던 곰방대를 벗 삼아 한 곡조 슬피 뽑아내시곤 하던 할머니가 부른다.


"학교 다녀 엇다 쓸래? 계집년이,, 이루 와봐!"


주섬주섬 고쟁이 속주머니를 뒤져 손을 내민다.


살짝 녹은 알사탕 하나.


할머니의 마음도 언젠가 녹을 수 있었을까?


쓸쓸함을 이고 있는 할머니는 할미꽃을 빼닮았다. 


녹이지 못한  쓸쓸함에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날 밤.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반가운 이별을 했으리라.


세상과 이별한 아침에 마주한 할머니의 얼굴은 주름이 펴진 채 어떤 어느 날보다 곱고 팽팽했다.




이전 09화 오토바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