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은행 지점장 출신의 천 부장은 금년 1월에 퇴직했다. 많은 동기들이 이미 4~5년 전에 명퇴를 하고는 끝까지 남은 동기 1명과 함께 은행원 생활 30년을 넘기고 퇴직을 했다. 그간 숱한 퇴직의 압박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틴 그의 의지와 뚝심을 모두가 아는 터라 그의 퇴장은 아주 특별할 것이라 기대했다.
오랜만에 동기들과 만난 천 부장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 “전기기능사 자격을 땄지” 모두들 “와”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왜 그것을 했느냐”,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은 없었냐?” 하면서 질문이 꼬리를 문다. 천 부장은 말을 잇는다. “뭔가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찾다 보니 적성에 맞아 일단 준비했지요…”.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그는 운동 말고는 딱히 할 것이 없었단다. 지금은 그냥 장학금 받으면서 잘 쉬고 있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흔히들 퇴직자 사이에 ‘장학금’이라 일컫는 실업급여는 그저 퇴직자에게는 작은 위로일 뿐이다.
그가 전기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이유는 간단하다. ‘건설현장은 어디에나 있다’는 믿음 때문이며 따라서 이 자격증의 효용가치는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게 그의 희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 부장의 자격증은 몇 개월째 그의 서랍 속에 누워 있다. 왜 그럴까?
문득 3년 전의 고객이 떠오른다. 외국계 은행 대출 파트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고는 명예퇴직한 윤 차장은 컨설팅 기간 내내 소극적이었다. 자신의 역량이나 강점 등에 대한 탐색에는 애초 관심이 없었던 그와의 미팅 시간은 컨설팅 기간 내내 컨설턴트인 나에게도 무미건조할 정도로 답답했다. 윤 차장은 당장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윤 차장 스스로 자신의 욕구나 의지 등을 애써 무시한 채 허둥대는 모습이었고 그냥 ‘돈벌이’하는 직업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그리 흥미가 없어 보였다. 금융업 관련하여 서너 군데에 이력서를 작성하여 넣어봤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다 보니 그의 실망감과 좌절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미팅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전기'관련 자격증 자료를 건넸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봤는데 그 친구가 건설현장에서 전기 일을 한다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윤 차장은 그다음 달부터 6개월을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시험공부에 매진한 결과 자격을 취득하고는 지금 친구와 같이 건설현장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늦었지만 자신이 계획하고 준비한 만큼 기회가 왔을 때 새로운 직업을 찾은 케이스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가 퇴직 이후의 삶의 변화에 대한 보다 깊은 방향 모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25년 혹은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마치고 직장의 문을 나서는 그들에게는 좀 더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삶의 지표를 정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천 부장이나 윤 차장은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까지의 관성대로 그냥 했던 건지 아니면 주변에서 모두들 무엇인가를 하니까 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함 때문에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액션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이유만으로는 소위 인생 2막을 여는 건 왠지 궁색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통사회와 산업사회의 중간에 낀 bridge 세대라고 부른다. 실적, 목표, 성취, 달성…등등 이러한 용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조기 정년이다 명퇴다 하면서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시기가 도래했다. 앞만 보고 달렸던 이들의 퇴장은 화려한 듯하면서도 뭔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미완의 ‘막 내림’이다. 이후의 것들은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내려와서도 다시 무대 위를 바라보거나 무대 주변을 서성인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다른 누군가가 일을 한다고 하면 더욱 초조하다.
일은 삶을 윤택하게 해 주고 그 무엇보다 신성한 것이다. 특히나 남자에게 있어 일은 곧 ‘힘’을 상징한다. ‘일’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갖고 있거나 ‘나’를 복원하는 것이고 일이 없거나 일의 상실은 그야말로 ‘힘 빠지는 시간’인 것이다.
중년의 끝자락에 퇴직하고 새로운 일을 갖는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퇴직 직후 바로 여러 고민 없이 그냥 다른 일 자리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지 못한 채 지금껏 해왔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늘 같은 직종, 그 시장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는 ‘나이’를 묻는다. 이때 중년의 퇴직자들이 좌절한다.
중년, 재평가의 시기다. ‘나’를 관찰할 시간이 부족했다면 더더욱 ‘나’를 찾아볼 일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까지의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곧 다가오는 소중한 내 장년에게 3 ways를 물어볼 일이다. 여기서 tip 하나, 새로운 장(場)은 ‘나’만의 것이니 긴 호흡으로 준비해야 할 것임을 절대 명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