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오래전 일이다. 그날은 컨설팅 서비스를 받는 고객들과 함께 ‘아웃도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등산을 하고 내려와 늦은 점심을 하게 되었다. 여름이라 모두들 냉면을 먹자고 해서 산 아래에 있는 냉면집을 찾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서빙하는 직원이 주문한 냉면을 탁자에 내려놓고는”잘라 드릴까요?”하면서 가위를 들이댄다. 옆에 있는 고객 왈”아니, 회사에서 잘렸으면 됐지 여기서도 잘려야 돼?’ 뒤이어 “그래 잘라라, 잘라”
한 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들 명퇴자였다. 대부분 비 자발적 퇴직자들이었다. 프로그램에도 비교적 참석률이 낮은, 어쩌면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고객들이다. 불과 한 두 달 전 같은 회사 동료가 이젠 같은 퇴사 동기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하면서 말을 별로 섞지 않는 분위기, ‘나’를 밝히지 않는 심리상태에 있는 고객들이다. 그날 웃음은 자조 섞인 그들의 속 마음이었다.
그날 우리는 점심 이후에 커피를 마시며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었다. 중년기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얘기였다. 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어려운 시기에 있는 그들에게는 한 번쯤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 지속된 관계에 대한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이 관계라는 것이 인생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부부의 행복을 가늠하는 것은 신혼여행이 아니라 결혼 50주년 기념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한다.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에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 말고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해줘야 할 때도 있다. 공감과 무욕,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일단 결혼을 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관점을 유지하는 관계 속에서 부부가 적응하고 성장하고 함께 변화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곧 관계가 퇴색하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다.
관계를 오래 지속하려면 확실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바라지 않은 퇴직에 이어 잠재되어 있던 부부의 문제가 동시에 터지면서 이혼으로 귀결되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보다 더 큰 이혼의 문제는 오히려 쉽게 ‘결단’을 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이제 우리는 같이 살아가는 파트너의 성격은 어떠하며 오랜 관계가 심각한 영향을 끼칠 요소는 무엇인지 판단해야 한다. 특히나 ‘사람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고 애쓴다는 것은 아무튼 바꿔보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뭔가 바꿔보라는 요구를 받으면 싫어한다. 어떤 사람은 분노한다고 한다. 자기 행동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 기분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가끔은 파트너와 잘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이른바 재평가의 시간도 필요하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가 더없이 좋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관계에 힘을 불어넣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공감, 이해, 소통, 헌신 등이 그것이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시각을 고려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에서만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 사람의 세계가 어떤지를 두루 생각해 볼 시간조차 내지 않는다.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 종종 잘못 해석되어 오해도 하고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해 보도록 노력해 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분쟁해결 가능성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감정이입은 이해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사람의 감정에 ‘나’를 동일화시키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분출하기도 하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남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 자체가 싫어 그 분출의 횟수가 많아지거나 그 강도가 세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청이란 진짜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말한다. 서투른 경청의 기술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에 방해가 되어 관계를 힘들게 만든다. 누군가 자신이 항상 무시당한다면 좌절감이 너무 커서 소통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 기술은 관계를 늪으로 빠뜨리는 주요 원인이다. 서로의 감정과 욕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부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이처럼 효과적인 소통 기술에는 잘 들어주기 뿐만 아니라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년기에 맞은 ‘원치 않은 퇴직’은 분명 위기상황이다. 서로 바쁘고 주변 모두가 분주한 세상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부부들은 소통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가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우리의 시간과 끊임없는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