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중년도 重年인가?

中年 中心

by 허니

중년에게는 꿈이 없다는 말이 있다. 가족을 위해서 혹은 그보다 더한 살벌한 사회에서 버텨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꿈을 지키고 확장해 나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중년은 꿈을 꾸지 못한다. 아니 꿈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치열한 산업사회를 관통하는 사회에 살았던 중년 세대들은 시간적 여유나 심리적 여유 모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꿈은 사치다.


IT기업의 백 이사 이야기다. 그는 어렸을 때 꿈이 화가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교내 사생대회를 거쳐 전국대회까지 진출한 그의 그림 솜씨는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온 집안의 화젯거리였으며 동네의 자랑이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며 미대에 가겠다며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가족들은 미술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유인 즉 미술을 해서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시절 한창 인기가 있었던 공대에 진학하는 것이 가정형편에도 도움이 되고 향후 전망도 좋을 것이라는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 그는 많은 시간 고민하다 그만 미대에 가는 걸 포기하였다. 오랜 시간 미술에 공을 들여왔던 그로서는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후 공대에 들어가 IT를 전공했다. 졸업을 해서는 운 좋게도 좋은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대학시절부터는 일절 미술을 멀리하고 전공 공부에만 몰입했던 결과였다. 이후 안정적인 직장 덕분에 결혼도 하고 집안 경제도 좋아졌고 누구에게도 부럽지 않은 좋은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면서 살아왔다.

직장생활을 한 지 25년. 그 언젠가부터 편한 잠을 자지 못했다. 자주 꿈을 꾸고 새벽에는 늘 깨어 있는 버릇이 생겼다. 회사에서 곧 대대적인 명퇴를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부터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분위기 탓인지 회사에 나가도 딱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그는 종종 고객사 방문을 핑계로 강남에 있는 회사에서 나와서 종로와 인사동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오고는 했다. 인사동에 즐비한 옛 물건들을 보는 재미와 종로 뒷골목을 배회하는 루틴이 생겼다. 마음이 심란했던 그에게는 대학시절 열심히 드나들었던 막걸릿집에 들러 먼저 회사를 떠난 선배를 불러내서는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인사동에서 열리는 어느 화가의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가의 그림 앞에서 그는 한참을 서서 찬찬히 그림을 봤다. 오랜 시간 그림 앞에서 서 있었던 그는 자신의 ‘놓아버린 꿈’이 되살아 나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 날 시간을 내어 다시 전시회에 들러 어제 보지 못했던 그림들을 보고 또 다른 미술관에 들르기를 계속했다. 전시회를 여는 화가들과 그 동료들의 축하 소리 등을 들으면서 학창 시절 ‘다빈치’라며 자신에게 쏟아진 주변의 칭찬이 오버랩됨을 느꼈다. 명퇴 문제로 불면의 밤을 지내던 그가 어쩌다 잠이 들면 가끔씩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그림 그리는 꿈을 꾼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개운치 않다. 백 이사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정작 그의 ‘못다 함’이 그를 매일 뒤척이게 만든 것이었다.


명퇴를 하면 뭘 하지? 이 나이에 직장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인가? 어쩌면 치열한 직장생활, 매일 시달리던 교통지옥, 끊임없는 회의, 동료와의 갈등, 실적과의 싸움, 압박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백 이사는 결단했다. 그림에 다음 ‘생(生)’을 걸기로 했다. 마음 한 구석이 허허로왔던 그의 실존, 그가 생각해낸 것을 초등학교 시절의 그 순수는 아니더라도 그 시절 좋아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는 건 그야말로 모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restart인 것이다. 다행히도 백 이사는 동기들보다는 나은 경제 환경에 있는 것이 ‘자신의 길’을 가는 모멘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백 이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찍은 셀카 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고는 미팅 때 최신 IT기반의 그림 그리기에 도전할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데생 및 사진 기초반에 들어갔다며 회원증을 보여주었다. 백 이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중년에게는 욕구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성찰이 필요하다. 간단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몰입할 수 있는 것, 재미있는 것, 즐거운 것에 대한 관심의 폭을 확장하면 된다. 중년의 꿈은 끄집어내기가 어렵다. 아니 말하기가 쑥스럽기도 한 것이 “이 나이에 ……”라는 장벽을 스스로 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 존중받아야 할 것이고 잃어버려서도 안될 것이다. 기억 저편 아스라한 꿈, 비타 아즈의 심연보다도 더 아래였던 꿈이라도 다시 한번 두레박을 던져 끌어올려 볼 일이다. 그것이 중년을 사는 ‘긍정의 우물’, 바로 ‘나’ 아닌가?


“당신의 퇴직은 명퇴가 아닌 은총”이라는 나의 위로 섞인 말을 멋쩍은 듯 웃어넘겼던 백 이사는 지금 그림과 함께 생활하는 자신의 바람을 실천해 나아가는 멈추지 않는 중년(中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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