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年 中心
아웃플레이스먼트 컨설팅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는 실직을 하거나 퇴직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거나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솔루션을 제공하여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데 도움을 주는 전직(轉職) 지원 서비스다. 그래서인지 컨설팅 초기에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침울한 표정이나 자신감이 떨어진 얼굴들을 하고 미팅에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지방에 있는 기업에 근무하는 김 부장은 회사에서 구조 조정하는 과정에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침 회사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컨설팅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하여 컨설팅 참여를 결정하였다. 김 부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첫 미팅 시간에 나타났다. 전체적인 프로그램 개요와 서비스 영역을 설명하는 중에 김 부장이 말을 막았다. “저는 일자리는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미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황스러웠다. 그럼 왜 온 것일까?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하면서 컨설팅의 세부적인 서비스 영역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그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았다. 약간은 머뭇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날까요?”하면서 그를 보냈다.
김 부장을 보내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일자리는 해결되었는데 왜 표정이 어두울까? 흔히 갖고 있는 실직 초기의 불안함과 상실감도 아닐 텐데 어떠한 다른 고민이 있는 걸까? 일주일 후 다시 미팅룸에서 만난 김 부장은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오래전부터 회사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자격증도 취득하고 해서 곧 다른 회사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했단다. 그런데 회사를 옮긴다고 해서 무엇이 나아지겠냐고 하면서 또 머뭇거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남들은 이제 일자리 찾느라 고생할 텐데 김 부장님은 꽃 길을 가는 것 아닌가요?” 그는 한숨을 쉬며 얘기를 계속한다. “혹시 취업이나 뭐 이런 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가요?”. 컨설팅 현장에서의 고객은 지금의 표면적인 문제 말고도 다른 여러 상황들이 내재해 있거나 복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상담 관련 공부를 한 것을 알고 온 것일까? 신기했다.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아이와 부인, 이렇게 김 부장의 식구는 3명이다. 그런데 김 부장은 부인과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서로 대화하지 않고 지낸다. 물론 부부가 한 방을 쓰지 않는다. 김 부장이 출근할 때에도 안방에 있는 부인은 움직임이 없다. 남편이 아침을 거르고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오기를 8개월, 회사는 점점 어려워졌다. 회사에서는 부서를 통폐합한다는데 데리고 있던 직원들의 자리도 걱정되고 자신의 진퇴도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가정에서 따뜻한 위로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김 부장은 매일 술로 지내고 있었단다.
어쩌다 집에 조금 일찍 들어갈 때 마주치는 딸아이의 얼굴에는 ‘참 잘들 하십니다’라고 쓰여 있는 듯하다. 거실에서 딸아이와 얘기하고 있던 부인은 일찍 온 남편을 보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다음 날, 아침도 거른 채 슬며시 집을 나온다. 처음에는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잦아지고 늦게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늘면서 김 부장의 부인은 김 부장의 건강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잔소리를 하게 되고, 김 부장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등 대화가 격해졌다.
그들의 ‘침묵의 전쟁’은 서막이 이랬다. 어느 날 딸아이의 학교 성적과 관련해서 부부가 얘기를 나누다가 부인이 김 부장에게 다음 날 학교에 방문해서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을 만나라고 한다. 김 부장은 “지금 회사 문제가 심각한데 당신이 가라”라고 하면서 “아이 성적과 학교 문제는 당신 소관”이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부인도 “회사가 딸아이보다 중요하냐”면서 대들었다. 급기야 딸아이도 나서서 “나는 엄마나 아빠 딸이 아니다. 나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 나는 당신네 딸이 아니다”라고 집을 박차고 나갔다. 집을 나간 딸아이 걱정도 될 텐데 김 부장은 집을 나와 저녁에 들렀던 술집에 가서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이가 새벽녘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날 이후 한 집안 3인의 희한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부인과 대판 싸우고 나니 오히려 술을 먹고 늦게 들어가도 신경 쓸 일이 없어 좋았던 김 부장은 매일 같이 정말 ‘성실’하게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런데 부인, 딸아이와 대화를 끊고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해질 무렵 김 부장은 출근할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바로 옮기려던 회사에서는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부인과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고역을 어찌 참을 수 있겠나 싶어 김 부장은 센터에 나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강의에 참석하고는 저녁에는 동료들과 술 먹고 늦게 들어가는 패턴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출근할 곳이 없어 집에서 탈출한 김 부장은 센터에 나와 다양한 강의에 참여하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점차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할 즈음 김 부장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것도 해요?"
센터에 나와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김 부장의 표정은 점차 좋아졌다. 미팅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편안해지는 김 부장의 얼굴을 보니 변화의 기미가 보여 그들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김 부장은 사내에서 만나 결혼한 케이스다. 딸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는 같은 직장에서 서로 맞벌이를 하면서 재미있게 살았단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서로 약속한 대로 부인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 양육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아이의 성적이 부부의 최대 관심사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고등학교 진로를 두고 서로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 무렵 김 부장이 다니는 회사는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가 제 살길을 찾고자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러면서 그들 부부는 서로 ‘전쟁’을 시작한 지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가정의 문제를 입 밖으로 내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부인과의 갈등이나 자녀들의 문제를 회사의 업무보다는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회사에서의 ‘일’이 곧 생존이고 ‘힘’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이러한 문제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나 구조조정 같은 절박한 상황이 자신의 앞에 있다면 더욱 이러한 문제는 잊기 쉽다. 야속하게도 이러한 시기가 중년의 계절에 같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김 부장과 미팅을 하면서 ‘내 아내의 치명적인 매력 5개’를 매번 미팅 때마다 써오는 것을 과제로 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소극적이었던 그가 1주, 2주…. 2개월을 넘기면서도 미팅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부인의 매력포인트를 꼬박꼬박 써왔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아내가 이렇게 매력이 있는 여자인 줄 몰랐다면서 점차 딸아이와 가까워졌고 아내가 자신의 아침을 챙겨 주었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김 부장은 센터 프로그램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들어가 혼자 방에서 ‘내 아내의 치명적인 매력 5개’과제에 골몰하면서부터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물론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자신에게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연애시절 첫 마음이 그렇게 변한 것은 시간이 변한 것보다는 자신이 너무 변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김 부장은 이렇게 미팅을 하는 도중 약속했던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 날 음료 박스를 들고 들어오면서 수줍은 듯 이야기한다. “선생님, 며칠 전부터 한 방을 씁니다”.
나는 김 부장에게 그때까지의 과제들을 챙겨 주면서 “부인의 매력이 50개가 넘는데 어떤 걸 1번으로 할까요?”라고 물었다. 김 부장은 주저 없이 ‘‘나를 지금도 믿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고 말한다. 김 부장은 매년 연말이면 자신의 근황을 알려온다. 어느덧 기업의 전무님이다. 그의 부인은 여전히 그에게 매력 뿜 뿜이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