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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Apr 06. 2022

그 해 겨울은

꿈을 향해 나아간 시간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도 사인을 해야 하는 그날이.

고등학교 1 학년 겨울방학 살얼음이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저녁 먹고 모두들 안방으로 오라 하신다. 부모님, 오빠,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우리 사 남매가 모두 모였다.

아버지의 글씨가 적힌 종이와 백지 두장을 주신 후 나보고 그대로 보고 적으라 하셨다.  똑같이 두 장을 적었다. 3년 전에 오빠가 적는 걸 보았지만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보기만 할 때와 내가 직접 적어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서약서


○○○은 19○○년 대학입시에서 국립대학교를 지원하겠습니다. 서울지역으로 진학을 원하는 경우에도 국립대학교를 지원하겠습니다.

지원한 대학에 떨어졌을 때

재수하는 대신 2 년제 전문대학에 지원하거나 취업을 하겠습니다.


집안 형편상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에

후에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19○○년 ○월 ○일

                                 ○○○ (인)




자식들을 교육하는데 아끼지 않던 부모님이셨지만 초등학교 교사의 외벌이 수입으로 자녀 4 명의 대학 진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등록금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도 몰랐고, 그것보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고 1 여학생은 이런 서약서를 써야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 힘이 없었던 나는 이 서약서를 그대로 쓰고 두 장의 (인) 자리에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한 장은 부모님이 가지고, 나머지 한 장은 나를 주셨다.

이 서약서를 쓴 날 밤에 안방 앞을 지나다가 어머니가 아버지와 나누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저 애가 서울교대를 가겠다 하면 어쩌지요? 그곳도 국립대니.."


지방에 살고 있던 내가 친구들처럼 서울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국립대인 서울대학교에 지원해 합격해야만 했다. 그날 나는 우리 집에서 서울 유학은 힘들겠구나 하며 일찌감치 서울 유학의 꿈은 접었다.

여고시절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는 친구들과의 사이를 서먹서먹하게 했고 그와 함께 학습의욕까지 떨어뜨려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서약서에는 국립대학 떨어지면 전문대에 진학한다고 지장을 찍었지만 그때 나는 우리 고향에 있는 국립대도 갈 수 있을까 의문인 성적이었다.


 서약서를 작성하고 며칠간 나는 그 종이를 볼 때마다 노려보며 왜 우리 집은 이딴 것까지 써야 하냐며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그때부터 나의 악바리 근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고향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1년 뒤에 여동생이, 또 1년 뒤에 막내인 남동생이 서약서를 썼다. 그리고 동생들도 연달아 국립대에 진학을 하였다. 나중에 오빠를 통해 안 사실은 우리의 국립대학 등록금도 아버지는 국가에 무이자 학자금 대출을 받아 내어 주셨다. 이자는 없었지만 학생의 대학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후부터 아버지의 월급에서 차감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4남매의 장녀였던 나는 이를 악물어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갚아야 하는 대출금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현실 속 나는 서울 유학을 갔던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 대학생이 된 후 방학이 되어 서울에 간 친구들이 내려오면 같이 만났다. 한 번은 여름방학에 고3 때 같은 반 친구들과 고3 담임선생님과 다 같이 식당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했다. 그날 식당 TV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속보가 보도되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이 나 얼마 전에 저 백화점 갔었다며 깜짝 놀라는 통에 식사를 어찌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엄청난 인재 뉴스를 보며 뉴스에 나온 저곳을 가보았다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한없이 철없는 나는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한 부러움은 없어지지 않고 살아가면서 한 번씩 나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강산이 한번 넘게 변했을 때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나의 학창 시절과 비슷한 때라 정말 몰입해서 봤었는데 신촌 하숙집에 들어온 삼천포, 해태, 빙그레, 윤진을 나는 또 부러워하고 있었다. '너희는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갈 수 있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도 한 번 더 그랬다.

극 중 서울대 의대생들이었던 99즈, 그중에 지방에서 올라간 이익준과 김준완 교수를 보며 내가 서울 유학을 가려면 가야만 했던 그 대학을 간 드라마 속 인물들을 또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밥을 못 먹고 사는 것은 아닌데 더욱이 타국의 서울에도 살아보고 있는데 그 부러움은 그 시절 내가 못 가본 길에 대한 동경 이리라..


 대학합격증을 받고 첫 학기 수강신청을 하고 온 날 나는 그 서약서를 찢었다.

재수 안 해도 되고 전문대에 안 가도 되고 바로 취업도 안 해도 되니 찢어버렸다.

지금의 나라면 사진이라도 남겨두었을 텐데 그때 나에게 그 서약서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을 이제 아이가 몇 년 있으면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어 꺼내어 보았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서약서 얘기를 해주었더니 큰아이가 놀라며 우리도 국립대학만 갈 수 있고 재수는 못하냐 한다.

그때는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그 서약서가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오는 길에 근성이 되어주어 이제야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해 겨울은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내 꿈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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