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에 임성한 작가의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언니 금주와 동생 은주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니 금주는 대학원생이고 동생 은주는 간호사이다. 언니는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서 예쁘기는 하지만 이기적이고 의존적이며 철이 없다. 반면 동생은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본인이 하고 싶어 했던 미술을 포기하고 간호대에 진학해서 간호사가 되는 효녀다.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고 부모님을 위하는 사람은 동생이었지만 집안에서 사랑받는 이는 오히려 언니였다. 사랑받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닌가 보다. 자매에 대한 엄마의 차별과 그로 인한 자매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너무 실감 나게 그려져서 몰입해서 봤던 드라마 중 하나였다.
연미와 유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언니 유미가 평범한 여대에 진학하자 실망했던 부모님은 언니가 일류대 대학원에 진학하니 다시 얼굴에 웃음을 되찾는다. 그리고 수십 번의 선을 보고 가정적이고 반듯한 의사와 결혼하자 집안의 자랑이 된다. 동생 유미가 선을 보거나 할 때도 엄마는 꼭 언니를 대동하고 나가서 상대편 집안에 일류대 대학원 출신인 미모의 언니를 소개했다. 그리고 형부가 병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잊지 않고 강조한다.
동생 유미가 선보는 남자들에 대해 불평을 하자 언니는 결혼은 아무하고나 하는 것이라며 핀잔을 준다. 결혼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뻔하고 속물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언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 고독은 모를 거 같은 언니. 그에 반해 언니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간 이후로 항상 혼자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갔던 유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고독이 몸에 배어있다. 대학원 석사까지 마쳤지만 가족들 누구도 유미의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긋지긋할 정도의 외로움의 구렁텅이에 빠져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영국유학을 결심하고 떠나는 유미. 그러나 다정함에 굶주린 사람은 어디를 가나 외롭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유미의 외로움은 여전했다.
어느 날 유미에게 소포가 온다. 거기에는 언니의 대학원 시절 사진과 노트가 있다. 그 노트 내용을 통해 언니가 결혼 전 유부남 교수와 열정적인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 삶의 정면은 오직 그 교수뿐이며 나머지 삶은 모두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과감한 발언도 있다. 너무 사랑했기에 불안하고, 항상 불행했던 사랑을 했던 언니는 철저하게 그 사랑의 감정을 놓고 감정적으로는 텅 빈, 그렇기에 안전하고 편안한 사람을 만나결혼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강한 것에 기대지 않으면 불안했던 언니는 아마 그 성격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된다. 타인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는 결혼 이후 언니는 오히려 철저히 혼자 있는 법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항상 언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유미는 언니의 비밀을 공유하고 나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외로웠던 유학 시절, 상대적으로 더 외로웠던 서울 생활을 떠올리며 서울보다는 영국이 낫다고 생각했던 유미. 이제 유미는 이렇게 말한다. 언니와 나는 다르다. 언니는 연미고 나는 유미라고. 더 이상 언니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치밀한 사건을 구성해 큰 반전이 있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자매관계라는 현실적인 소재로 여자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되는 결혼의 아이러니한 한 단면을 보여준 소설이라 생각한다. 혼자가 될 수 있다면 결혼은 행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