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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인도사 Jul 29. 2021

무인도 생활기 연재_뉴칼레도니아3

무인도에서 슬며시 다가온 것들

# 슬며시 다가온 것들 

ᅠ 

ᅠ부끄럽게도 그리 많진 않지만 홀린듯 글을 쓰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가슴이 허하고 먹먹한 날이면 그렇고 이런 날 뭔가 하나가 슬며시 내게로 오면 더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날입니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다 폰을 들었는데 우연히 헤어진 이의 글을 본 날. 오래도록 해외로 가게 된 친구를 배웅하며 혼자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오는 날. 돌아가신 할머니 댁에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할 때. 좋아하던 영화감독이 죽은지 몇 해째 되는 날. 죽은 거북 한마리가 퉁퉁 부운 눈을 한 채 해변까지 떠내려 왔을 때.ᅠ  

    

ᅠ불완전한 것들을 볼 때 정신없이 메모를 해두기도 합니다. 공기에 기댄 나무가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모습을 한참 바라봅니다. 사거리의 빨간불은 꽤 길었거든요. 카페의 나무의자를 만지다 모서리가 검은 부분을 봤습니다. 아픔이 있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기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음을 메모합니다. 코코넛크랩의 한쪽 집게가 떨어져 나간것을보고 나의 몸과 마음이 이렇지 않나 싶었습니다.ᅠ


      


ᅠ친구와 밥을 먹다 선배와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적어둡니다. 비오는 골목길, 습한 그 어귀의 담벼락에 사는 이끼 냄새를 그대로 만드는 조향사이야기나 3년간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한 남자가 3년을 참다 3년 하고도 하루가 지난 다음날부터 다시 담배를 피우는 이야기들을요. 언젠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글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마주보며ᅠ이야기를 하다 제가 폰을 들고 메모를 해도 이해해주세요. 이곳 무인도의 그림자는 그토록 오래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ᅠ     

 

ᅠ역시나 이런저런 핑계지만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특히 격식있는 옷을 입었을 때. 정장이나 셔츠를 입고 글을 쓰면 왠지 한번에 좋은 글만 써내려가야 할것 같습니다. 약간은 구부정한게 편한데 일단 그렇게 앉을수도 없고요. 연필로 연습장에 깨작이는 것이 아니라 만연필을 들고 백지에 일자로 흐트름없이 써내려가야 합니다. 화려한 옷일수록 이상하게 이런 마음이 드니 무인도에 갈 때엔 역시나 편한 옷만 챙기게 됩니다.ᅠ      

ᅠ지나치게 조용하거나 시끄러워서도 안됩니다. 느리게 가는 기차에서 천천히 그리고 주기적으로 들리는 안정적인 덜컹임 정도가 좋습니다. 시도해보진 않았지만 그래서 매트로놈을 켜두고 글을 쓰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소리가 불규칙하다면 들릴듯 말듯 해야 합니다. 피아노 연주 소리나 웅성거리는 정도까진 또 괜찮습니다. 쓸데없이 까다롭기만한 저를 규칙적으로 파도가 다스려주니 이곳은 평온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지만 불안하진 않아 펜을 들 수 있습니다.      


ᅠ또 다른 일이 많을 땐 쓸 수 없습니다. 저녁에 누굴 만나야 한다면 그날은 종일 글쓰기엔 글렀습니다. 다음달까지 해야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이 신경쓰여 글을 쓰지 못합니다. 일주일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요. 옆에 누군가 있거나 제 글을 누군가 본다면 더욱 힘들어집니다. 제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러워 지거든요. 아무말도 하지 않더라도 누가 제 글을 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일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적어도 그런 걱정은 없는 곳입니다.      


ᅠ또 한차례 세찬 비가 내렸습니다. 바람도 햇빛도 별도 매일 불규칙하니 규칙적이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놓입니다. 친구가 일하는 목장에서 들었는데요 우유를 짜면 판매되기 전에 성분을 일정하게 맞춘다고 합니다. 분석해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놓고 많은 부분은 덜어 균일한 성분으로 팩에 담겨 팔린다고 합니다. 이전에 제가 욕심냈던 글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여기와서 조금 마음을 크게 먹었습니다. 일상은 이리도 불규칙인데 어찌 사람이 쓰는 글이 한결같을 수 있을까란 생각으로요. 컨디션에 따라 주제에 따라 기분에 따라 느낌이 다른 건 애초에 사람이기에 그런지 모릅니다. 울적해하다 곧바로 기뻐 방방뛰는 글을 보아도, 글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작가를 실제로 만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향곡이 항상 클라이막스를 치지 않는 것처럼, 태양이 항상 뜨겁지 않고 몇 월 며칠의 날씨가 매년 같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늘상 그렇지 않은 것처럼. 빈문서에 깜빡이는 커서나 키보드 자판의 무게가 늘 다른 것을 이제야 알았다면 너무 늦은걸까요. 



[윤승철]

주로 사람이 많지 않은 곳들을 찾아다닌다.

키르키스스탄 대초원이나 사막, 아마존, 남극 같은 곳. 그리고 무인도까지.

대한민국 실크로드 탐험대 청년탐사대장으로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을 모두 횡단했고, 히말라야에 올랐으며

세계 최연소로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대한민국인재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환경부장관상과 헌혈유공표창, 서울특별시장상, 경희대총장상, 박영석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무인도로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무인도섬테마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섬과 쓰레기가 많은 섬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는 [섬마을봉사연합]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동국대학교에서 시를 전공했으며 저서로는 [달리는 청춘의 시](문광부우수도서), [여행이 좋아서 청춘이 빛나서](공저), [마음을 만지는 만지도], [실크로드 길 위에서 길을 열다](공저) 등이 있다.

현재는 무인도체험 및 생태 프로그램 운영과 기관 및 방송 자문, 섬봉사단체 운영에 매진하고 있다. 


*무인도섬테마연구소 : www.islandlab.co.kr

**섬마을봉사연합 : www.with-ivu.com

***유튜브 채널 : 무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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