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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순이 이야기

첫딸에게 무심한 엄마

by 설여사

국민학교 5학년때 첫 생리를 시작했다. 생리가 뭔지도 모르던 나는 이제 나는 죽는구나 생각했다. 속옷을 혼자 빨거나 숨기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내가 숨겨둔 속옷을 들고 나오며

"이거 너 거야?" 하며 물었다. 난 그렇다고 대답하며 속으로 숨죽여 있는데 엄마는 "다음에 또 그러면 얘기해." 그러고는 가버렸다. 난 그제야 죽는 병은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참 무뚝뚝하고 무심한 엄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여자가 되었고 그렇게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난 많이 외로웠다. 우리 집은 그저 살아갈 뿐 내가 의지 할 어른은 없었다. 6학년 여름 어느 날 죽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혼자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왜 태어난 건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단 생각에 그 어린 나이에 손에 잡히는 선풍기선을 목에 감았다. 근데 죽지 못했다. 13살 외로웠던 여자 아이의 허무한 자살시도는 아무도 모르게 끝났다.


6학년 겨울방학 하루 전 학교 갔다 집에 오니 구멍가게 문도 닫혀있고 아무도 없었다. 하염없이 가족을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졌고 그날따라 밤새 눈이 제법 내렸다. 밤새 눈을 치우며 기다렸지만 아무 연락도 없이 가족들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혼자 학교를 갔다. 방학날이라 방학식을 하고 일 년 동안 저금했던 학교통장의 돈을 찾으러 농협에 가니 외가댁 근처에 사는 농협직원 언니가

"너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외가댁에 안 갔어?"라는 말에 그제야 모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가댁에 간 걸 알았고 그 길로 외갓집으로 갔다. 엄마는 밤새 국민학교 6학년 딸이 안 와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 둘만 데리고 가서는 첫째 딸은 잊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진짜 계모 같았다.

몇십 년이 흘러 사십 후반에 내가 용기 내서 엄마에게 그 얘기를 꺼냈었다. 엄마가 나만 두고 갔다고 내가 밤새 전화기를 쳐다보며 기다렸다고 하자 엄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집엔 그때 전화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난 너무 놀랬다. 엄마는 그날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엄마는 그 말이 끝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나 변명 따위는 내게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한 엄마의 지적에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전화가 없었으면 삼촌이 셋이나 있었는데 데리러 왔어야지. 이웃집에 전화해서 딸을 외갓집에 오라고 했어야지."라는 말을 차마 엄마에게 하지 못했다.

난 엄마가 되고 나서 그런 엄마가 더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엄마가 더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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