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슬픈일

깜빡깜빡 건망증

by 설여사

어제는 날씨가 덥고 습해서인지 만사가 귀찮았다. 아침에 전복 넣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것으로 하루를 때울 참이었다. 가끔 살림하기 싫을 날이 있지 않은가. 어제가 그날이었다. 아침에 된장찌개 달랑 하나 끓여놓고 저녁에 반찬을 하지 않았다. 남편도 8시나 되어야 온다고 했다. 남편은 늦은 저녁에 귀가하면 거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에 먹었던 반찬으로 간단하게 차려줘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저녁도 전복된장찌개로 대충 해결하려고 했다.

아들은 항상 7시쯤 저녁을 먹으니 설여사 혼자 5시쯤 전복 넣은 된장찌개에 먼저 저녁밥을 먹었다. 7시쯤 아들이 방에서 나오며 묻는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응... 전복 넣은 된장찌개인데..."

"그게 다예요?"

"응... 왜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그냥 그거 먹을게요."

하며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아들은 고기반찬이 없어서 못마땅한 것 같다. 미안했지만 오늘은 설여사도 모른척하기로 했다.

7시 30분 아들이 방에서 나와 저녁을 먹는다. 아들이 밥을 뜨고 조금 있으니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나 지금 퇴근해. 당신은 저녁 먹었어?"

"당연히 먹었지. 왜?"

"아니 맛있는 거 있나 해서?"

"맛있는 거? 뭐가 먹고 싶은데?"

"아니 그냥... 오늘 월급날인데 마누라가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나 해서."

아차.... 오늘이 남편의 월급날이고 마침 내일은 남편의 휴무날이다. 휴무날 전날이면 부담 없이 한잔할 수 있는 날이라 남편은 술안주를 기대했던 것 같은데 눈치 없는 마누라가 아무것도 안 해놨다고 하니 서운해하는 눈치다.

에고 그냥 대충 때우려 했는데 안 되겠다.

"집에 부추 있는데 부추전 해놓을게 들어오면서 막걸리 사 올래요?"

하니 그제야 좋아하는 남편이다.

냉장고에 어제 넣어둔 부추를 다듬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빨리 온다고?

놀라 현관문을 쳐다보니 모처럼 일찍 퇴근한 딸이 배가 고프다며 들어온다.


딸에게 반찬은 전복된장찌개라고 했더니 짜파게티를 끓여 먹겠다고 한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끓이는 길에 아빠 것까지 두 개를 끓이라고 하고는 나는 부추전을 시작했다. 부추전만 내놓기 미안해서 감자도 하나 썰어 감자채 전도 부치기로 했다.

딸이 끓인 짜파게티와 부추전 한 장이 완성이 되었을 때 딱 맞춰 남편이 들어왔다. 며칠 전 담은 파김치를 올려 남편과 딸은 그나마 짜파게티를 맛있게 먹는다. 남편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딸이 끓여준 짜파게티라 군말 없이 먹는다. 짜파게티에 막걸리 한잔 먹고 부추전에 막걸리 두 잔 먹고 감자채 전에 막거리 세잔 먹고... 막걸리 2병에 행복만땅 된 남편이다.


딸은 유치원 교사다. 딸은 매번 잡무에 늦은 시간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모처럼 그나마 일찍 퇴근을 했다. 집에 온 딸은 오자마자 세탁실을 열어보며 어제 자신이 유치원에서 가져온 숲체험 갈 때 아이들에게 매주는 스카프를 빨았냐고 물어본다. 오늘은 살림을 놓은 설여사는 당연히 빨래를 안 했다. 딸은 이번 주 토요일 행사가 있어서 급하게 낼까지 가져가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 빨아줄 수 있냐고 묻는다. 저녁식사 후에 빨아주겠다고 말하고 나는 부추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저녁을 끝내니 9시가 넘었다.

피곤에 지친 딸은 밥을 먹고는 오랜만에 편하게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10시 반이 되도록 남편과 뉴스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자러 들어갔다. 요즘은 할머니처럼 9시가 넘으면 잠이 쏟아진다. 며칠 동안 9시만 되면 자러들어갔는데 오늘은 그래도 10시를 넘겼다.


다음날.

어제는 살림하기 싫은 설여사였지만 오늘은 제대로 살림모드에 들어가려 했다. 오늘 아침은 감자달걀샌드위치를 해줄 생각이다. 어제 오늘 아침을 위해 동네 빵집에서 맛있는 식빵도 사다 놓았다. 다행히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6시에 일어나 감자와 계란을 삶고 오이와 햄도 썰어 넣고 따끈한 감자달걀샌드위치 속을 만들었다. 7시 10분이다. 딸이 일어나 아침인사를 하곤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딸이 씻고 나오기 전 참외도 썰어놓고 방울토마토도 씻어 담고 딸을 위한 아침식사 세팅을 끝냈다.

'완벽해...'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오늘 아침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욕실에서 나와 세탁실로 간 딸이

"엄마... 건조기에 스카프 넣으면 금방 말라?"라며 묻는다.

무슨 소린가 하며 쳐다보니 앗! 어제 딸이 부탁한 빨래를 안 했다. 딸은 당황해하며 스카프 뭉치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나는 딸에게 욕실에서 나오라고 하고 세면대에서 세제를 넣고 조물조물 스카프를 빨았다.

"엄마... 금방 마를까?" 하는 딸의 말에

"다리미로 말리면 금방 말라. 걱정하지 말고 너는 얼른 아침 먹어."

출근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하지만 딸은 내가 스카프를 빠는 동안 다리미를 꺼내와 코드를 꽂는다.


빨아온 스카프 10여 장을 다리는 동안 딸은 옆에서 다릴 수 있게 젖은 스카프를 펴주고 다린 스카프를 갠다. 나는 스카프를 다리는 동안 딸이 내가 차린 아침을 먹기를 바랐다. 그러나 딸은 내가 차린 아침을 먹지 못했다. 괜스레 엄마 믿고 있다가 딸이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한다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입이 짧은 데다 점심은 반 아이들 챙기느라 잘 먹지도 못한다는 딸이라서 아침이라도 그나마 챙겨주려고 하는데 오늘은 아예 아침도 못 먹고 가는 걸 보니 짠했다.


딸도 미안해하며 눈치를 본다.

"다음부터 유치원에서 빨아. 집에 가져오지 말고." 나의 말에

"유치원에 빨 때가 없어..." 하며 미안해하는 딸을 보니 괜스레 툴툴거린 내가 미안하다.

아이들 목에 두르는 조그만 손수건 10여 장 빨아주는 게 뭐가 그리 힘이 들겠는가. 깜빡하고 빨래를 안 해 논 내가 밉고 엄마 믿고 있다가 딸이 아침밥도 못 먹고 가는 게 속상해서 하는 소리였다.


정신없이 딸을 출근시키고 뒷산으로 운동을 갔다. 다녀오는 길에 그동안 하루에 만보를 걸으며 100원씩 적립해서 모은 쿠폰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카페에서 쿠폰으로 남편과 아들 것까지 세잔을 사들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오후에 아들이 고기반찬이 먹고 싶다고 해서 오늘은 흔쾌히 아들을 위해 룰루랄라 장을 보러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지갑에 있어야 할 카드가 없다. 뭐지? 왜 카드가 없을까? 오늘 카드를 쓴 건 오전에 들른 카페에서 뿐이다. 마트에서 돌아와 카페에 전화를 해보니 카드가 카페에 있단다. 쿠폰을 쓰고 모자란 금액을 카드로 결제하고 그대로 놓고 온 것이다. 아하~왜 이럴까? 스스로를 자책하며 카페로 달려가 카드를 찾아왔다.


자꾸자꾸 깜빡깜빡하는 설여사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는 이삼일 뒤에야 생각이 날 때도 있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아예 생각이 안 날 때도 있다. 무언가를 하려고 일어나서는 그새 까먹고 멍하니 서서 '뭐 하려고 했더라~' 다시 생각하곤 한다.

한 달 전부터 마트에 가면 건전지를 사 와야지 하는데 아직도 집에 돌아와서야 생각이 난다.


언제까지라도 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엄마다. 그러나 이제는 딸에게 미안한 일이 생길까 봐 조금씩 놓아야 할 것 같다.


딸아 엄마를 믿지 말아 주렴. 네가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젠 엄마도 엄마를 믿지 못하겠어서 그렇단다.

그러니 이제부턴 엄마 믿지 말고 네 할 일은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점점 더 건망증이 심해지는 설여사다.

날이 더워지니 증상이 더 심해지는 걸까.

60살도 안 됐는데 벌써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한숨이 나온다.



설여사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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