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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일간의 동행 그리고 이별...(11)

아버지는 1939년 9월 21일생... 

“아버지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정말 배고프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아버지는 1939년 음력 9월 21일 해시생(토끼띠)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부 이일용과 모 이금선의 첫째인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이 지금의 우리 가족 모두의 고향이자 본가와 경주 이 씨 익재공파 집성촌이 있는 경북 포항시 오천읍 세계리가 아니라 경북 영천시였다는 사실은 내가 육군 중위로 진급하여 소대장으로 군복무를 한창 하고 있던 1996년도 말경 무렵이었다. 


당시 연대 인사과장님의 호출을 받고 연대지휘통제실로 달려가보니 나에 대한 진급심사와 장기복무 관련 가족들 신분조회에서 내 아버지의 호적상 나이와 주민등록상 나이가 일치하지 않아 신원조회결과상 문제가 되니 신속히 고향으로 내려가 부친의 생년월일을 호적이든 주민등록이든 어느 쪽으로 일치시키고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가져와 제출하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 때문에 특별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오천읍사무소에서 호적의 원적지인 영천시를 찾아 호적을 정정하고 신청하여 바꾸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우리 가족들 중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아버지의 실제 출생지를 제대로 알고는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대화는 차분히 시작되었다.
아버지! 태어나신 곳은 어렴풋이라도 기억이 나세요? 

전에 저하고 호적생일로 주민등록변경하고 바꾸실 때 영천이 아버지 출생지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영천시 어딘지는 모르겠네요. 생각 좀 떠올려 보세요

아니 나도 당시에 너무 어려서 지금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네! 

아마 영천에 가서 찾아보려고 해도 너무 많이 변해서 전혀 모를 거 같다. 기억나는 거는 집옆에 큰 연못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그렇게 아버지는 흐릿하고 오래된 자신의 출생지 영천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며 흐뭇해하신다. 모르긴 해도 어린 나이였지만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영천시에서 지금의 고향 포항시 오천읍까지 비포장길 수십 리의 먼 길을 배고픔을 참아가며 며칠을 계속 힘들게 걸어서 이사 온 것만이 어렴풋이 어린 나이였지만 기억나시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태어나신 1939년도는 일제강점기가 한창이었던 먹고살기 참으로 힘든 때로 당시 조부님이신 이일용 할아버지께서 일제의 강제징용정책으로 마구잡이 우리 국민들을 자신들이 필요한 노역장으로 강제로 끌고 가 일을 시키던 때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이러한 일제의 강제징용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의 경북 영천시로 어느 날 끌려가 일본인들이 주도하여 건설하는 마을 댐과 각종 농사를 위한 재방 공사등에 투입되어 막일을 오래 동안 해야 했다고 한다. 


특히나 할아버지는 보통사람 보다 힘이 좋고 업무수행 능력이 탁월하여 이를 인정받아 당시 단순한 노무자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각 여러 노역장 현장을 감독하는 일과 투입된 조선인 등 인부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역할을 오랜 기간 하셔야 했다고 한다. 훗날 이런 할아버지의 강제징용에 대한 억울한 노역살이 와 징용에 대하여 아버지와 함께 노력하여 지역의 노역자명부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고 일제강제징용피해의 사실확인증을 받아 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 영천 공사현장인근에서 주변의 소개로 할머니와 중매로 만나 결혼하시게 되었고 그때 아버지와 고모님 두 분이 영천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장남인 아버지를 포함해 조부모님 슬하에 4남 1녀 중 아버지와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이자 둘째인 이성태 고모님까지만 영천시에서 태어나셨고 나머지 형제분들은 모두 지금의 고향인 포항시 오천읍 세계리로 조부모님이 힘들게 이주해 돌아오신 이후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금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비포장도로를 며칠 밤낮으로 종종걸음 하며 걸었고 할머니가 어린 고모를 등에 업으시고 머리에 무거운 짐을 지고 그렇게 지금의 고향 오천으로 들어오셨는데 아마 그때가 당신이 7살쯤 될 때였던 것 같다고 회상하신다. 


당시만 해도 가진 것 먹을 것 하나 없이 가난이 전부인 처지라 고향 오천읍 세계리로 빈손으로 들어와 주변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구걸하듯 도움을 받으며 살림을 시작해야 했고, 불쌍하게 여긴 여러 친척들에게 하루하루 식량을 얻어먹고 양해를 구하며 살다가 어느 친척집 사랑채에서 잠시 임시로 거주하며 그렇게 어렵게 귀향한 고향생활을 시작했었다고 한다. 


당시 공사현장에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할아버지의 투전버릇과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매일의 음주습관으로 모든 벌어들인 돈을 허비하여 날리고 고향으로 올 때는 마땅한 살림이나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단출한 짐 보따리 몇 개만을 이고 지고 가지고 이리저리 노숙자 뜨내기들처럼 옮겨 다니기를 수차례 하시다 겨우 동네 대나무밭에서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임시 움막 같은 거쳐를 만들어 기거하시다 친척어른들과 사촌들이 힘을 합쳐지어 준 동네 연못 밑 최초의 초가집인 고향집을 지어 그때서야 오랜 기간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제대로 된 집에서 사람처럼 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939년생 내 아버지의 인생은 힘들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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