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버스터미널에서 영암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오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몇 번씩 갈아타는 수고는 있지만, 산악회 버스로 가는 단체 산행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영암이 고향이고 대치동 사는 아줌마와 길동무 맺으니 길을 잘못 들 걱정도 없고, 가는 여정 또한 심심치 않다. 아들을 의대에 보낸 일과 세상 사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사이 차창 밖으로 월출산 능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月出山은 이름처럼 달이 뜨는 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으니, 예로부터 월출산은 달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달뜨는 모습이야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볼 수 있겠지만, 너른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 위로 둥근달이 걸리는 모습은 뭔가 특별함이 있었을 것이다.
영암(靈巖)이라는 지명도 신령한 바위라는 뜻으로 월출산에서 유래됐으니, 월출산이 곧 영암이고 영암은 월출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산행 들머리 월출산 국립공원 표지석 앞에 서니, 돌기둥 뒤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거대한 돌산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천황사 방향으로 산행을 시작하고, 산길로 접어들 때쯤 하춘화 선생의 노래비를 만난다.
반세기 전 여고생 가수 하춘화를 국민적 스타로 각인시켰고, 월출산을 전국적으로 알린 '영암 아리랑'이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 좋구나~
멜로디에 남도 특유의 흥이 있고, 노랫말은 영암 사람들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천황봉에 걸린 둥근달은 아마도 몽해 들판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이곳 사람들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춘화 앨범(영암 대중가요센터) 천황사 지나며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되고, 산정 방향으로 엄청난 바위군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3대 암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바위 절경을 자랑하지만, 섭씨 30도를 웃도는 대기 온도에 바위가 내뿜는 열기까지 보태니, 가마솥에 장작불 지피는 것처럼 산 전체가 펄펄 끓고 있다.
선선한 가을바람 쐬며 여유 있는 산행을 기대했지만 한여름 산행보다 더한 땀을 빼고 있다.
기암이 즐비한 곳이라 볼거리는 좋지만, 그늘이 없고 물이 귀한 단점이 있어 더운 날 산행은 피해야 할 산이다.
한 시간 여를 부지런히 올랐는데 아직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일하기 싫은 농부 밭고랑만 센다'는 말처럼 해발 고도가 적힌 119 말뚝으로 자꾸 눈이 간다.
"높이가 800미터 조금 넘는 산인데, 어째서 이럴까."
그렇다 출발지점 해발고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곳이니, 한 치도 에누리 없이 800 미터를 올라야 한다. 강원도 쪽 산이라면 거의 1500미터 급에 견줄 만한 엄청난 높이가 아닌가.
가쁜 숨 몰아쉬며 구름다리 앞 정자에 이른다. 시원한 그늘과 탁 트인 조망이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반갑기 그지없다.
정자에 걸터앉은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전라도 사투리도 정겹게 들려온다.
구름다리 다시 산행을 시작하고, 구름다리 지나 철계단으로 이어진다. 까딱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듯한 가파른 계단 구간이다.
코스는 힘들지만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황홀한 경치는 위안으로 삼을만하다.
생수 두 통을 다 비울 때쯤 천황봉 아래 통천문(通天門)에 이른다. 글자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통천문은 다른 여느 산에서도 가끔 한 번씩 만나는 돌문이며, 정상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는 신호로 생각하면 된다.
통천문 돌문을 지나 봉우리 옆으로 돌아가니 천황봉에 이른다. 큰 바윗 덩어리에 月出山 天皇峰이라 새겨져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바위는 아닌 것 같고, 어디선가 옮겨 놓은 듯한 큰 정상석이 특색 있다.
정상석 탁 트인 조망은 사방으로 거침이 없다. 산줄기가 도갑사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너머로 영산강과 목포까지 희미하게 보인다.
발아래로는 영암 시가지가 옹기종기 모여있고 주변으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근처에 이 산과 경쟁할만한 봉우리가 보이지 않으니,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월출산의 존재감은 더 컸을 것이다.
남도 땅끝으로 귀양 가던 선비들도 월출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국보급 가수 이미자도 '낭주골 처녀'를 통해 월출산을 노래했다.
트로트 노랫가락과 선비의 싯구(詩句) 마다 등장하는 월출산 둥근달은 보이지 않고, 이글거리는 해가 천황봉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천황봉을 바라보며 눈앞을 가리는 안개가 밉다고 통탄했지만, 오늘은 뜨거운 해가 원망스럽다.
능선 저 멀리 삐쭉 솟은 구정봉이 오라고 손짓하지만, 이 뜨거운 날씨에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 접어 두고, 산 아래로 도망치듯 발길을 돌린다.
정상에서 바라본 사자봉 2022.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