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로 가는 길'은 1972년 이상보 선생이 발표한 기행문 형식의 짧은 수필이다.
7~8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글이라, 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중장년층중에 기억하는 분이 더러 있을 것이다.
수필의 배경은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산길이며, 함박눈 내리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등산을 하며 남매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갑사로 가는 길'을 처음 접했던 시절에는 갑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때였다. 어쩌면 갑사가 절이라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수 있다. 수필의 제목만 '갑사로 가는 길'이었지, 갑사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었으니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업을 진행하시던 선생님도 갑사가 계룡산에 있는 절이라는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다.
이야기를 해 준들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말씀조차 없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학생들 중에서도 계룡산에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계룡산은 도사들이 많은 산 정도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옛 기억을 되살리며, 반세기 전 주인공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나선다.
동학사 동학사 대웅전 앞마당을 한 바퀴 휙 돌아 나와 남매탑 가는 길로 들어선다.
무질서하게 놓인 돌계단이지만 물을 뿌려 먼지와 모래를 씻어 낸 것처럼 돌이 반들반들하다. 적당한 기온도 등산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나뭇잎 푸르름이 옅어지고, 카랑카랑하던 매미 울음소리도 힘이 빠진 걸 보니, 남매탑 계곡에도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필 속 주인공은 함께 온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이 길을 올랐다. 사방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보드라운 밍크코트를 걸친 것으로 묘사했다.
오늘은 밍크코트 대신 풍성한 나뭇잎을 매달고 지나는 산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다.
또 물소리와 매미소리까지 있으니, 그 시절 못지않은 고급스러운 멋과 운치가 살아있다.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팍팍한 허벅지만 두들기는 언덕길이 계속되고,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남매탑 앞에 이른다.
앞쪽에 7층, 뒤로 5층짜리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탑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매탑 모양으로 봐서는 바람 불면 무너질 수도 있을 법한 엉성한 모습이지만, 두 탑 모두 보물로 지정된 귀한 문화재다.
공식적으로 '공주 청량사지 석탑'으로 명명되어 있지만 남매탑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남매탑'이란 이름과 탑에 얽힌 전설이 조화롭게 딱 맞아떨어져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거기에 더해 탑에 얽힌 전설이 교과서에 소개되며 더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맹수(猛獸)가 자기를 구해준 스님에게 아리따운 처자를 물어다 바친다'는 호랑이 담배 피울 적에나 있을법한 이야기지만 묘한 끌림이 있는 전설이다.
때는 신라시대 상원 조사가 이곳에서 토굴을 만들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입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걸려 있어 뽑아 주었더니 며칠 뒤 호랑이는 은공에 보답하는 뜻으로 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고 와서 내려놓고 갔다.
처녀는 경상도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밤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스님에게 말하였다.
그때는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겨울이라 돌려보낼 수 없어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자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주기를 바랐다.
이에 스님은 고심 끝에 처녀와 의남매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 시에 입적했다.
이렇게 의남매의 연을 맺어서 행자로서 열심히 정진한 두 분을 기리기 위해 스님의 제자인 회의 화상이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이 탑을 남매탑이라 부르게 되었다.『출처 : 계룡산 국립공원』
아리따운 처자를 물어 온 범(虎)의 진심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지만, 스님의 깊은 불심(佛心)과 순결한 사랑 이야기는 지나는 산객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탑을 뒤로하고 가파른 언덕길 한달음에 올라 삼불봉 고갯마루에 이른다.
동학사와 갑사, 그리고 삼불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이다.
단풍철에는 산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복잡한 곳이지만 아직은 제철이 아닌지 주변이 한산하다. 나무데크에 앉아 시원한 바람에 잠시 숨 고르고, 다시 금잔디 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널찍한 평지 지나자 급한 내리막이 시작된다. 갑사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다. 동학사에서 올라올 때와 비슷한 너덜 돌계단이 놓여있고, 아래로 갈수록 계곡수 소리가 점점 커진다.
갑사 계곡 곧 계곡을 벌겋게 불 지필 활엽수가 빽빽하고, 바위를 타고 넘는 계곡수는 은쟁반 위를 구르는 옥(玉)처럼 돋보인다.
본디 계룡산은 홑산이라 물이 많지 않은 산인데, 요 며칠 비가 온 탓에 여느 때 보다 멋진 계곡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용문폭포 계곡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수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갑사(甲寺)까지 덤으로 구경한다.
'春 마곡 秋 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올 가을엔 '갑사로 가는 길'이 아닌 '동학사로 가는 길'을 가보고 싶다.
갑사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