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風明月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뜻이다. 즉 아름다은 경치를 뜻하며,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원은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淸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낭월일전매)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고, 풀어보면'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갖는데 돈 한 푼 안 든다.'는 뜻이다. '하루에 삼백 잔씩 백 년을 마시겠노라'라고 노래한술꾼다운 표현이다.
청풍명월이라는 이름으로특허청에 상표 출원된 게 1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 충청북도에 속한 회사나 개인이 권리를 가진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니,청풍명월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과한 말은 아닌 듯싶다.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청풍군(淸風郡)이라는 지명이 청풍명월과는 가장 잘 어울리는 고장이었던 것같다.
이번코스는 덕주사에서 수산리까지 약 12km를 걷는 구간으로 월악산 코스 중 가장 긴 거리를 이동하는 산행이고경치 또한 가장 빼어난 곳이다.들머리인 송계계곡뿐만 아니라 정상을 지나 중봉, 하봉을 타고수산리로 가는 길은 청풍호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수산리 코스는처음 가는 길이라 나에게도 한껏 기대가 된다.
덕주사로 통하는 아스팔트길 따라가며 산행이 시작된다. 덕주사(德周寺)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딸 덕주공주가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마애미륵불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천년고찰이다.
사찰 앞에서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명함을 건네시고 계시다.
"내려오실 때 전화 주시면 바로 갑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나에게도 명함을 주신다. "예 ~ " 건성으로 대답하고 명함을 받지만, 등산객을 대상으로 택시 영업을 하시는 분이구나.정도로 생각하고명함을등산복 주머니에 넣는다.
탐방안내소 앞에 돌로 된 큰 안내석은 영봉(靈峰)까지4.9km를 가리키며,월악산자연경관과 생태계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하단에 '월악 영봉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 15-1번지입니다.'라고 주소가 적혀있다.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상덕주사(上 德周寺)로 올라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겉옷을 벗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온화한 날씨지만, 어제술을 많이 먹은 탓에 다리가 무겁다.
잠시 후 상덕주사(上德周寺)에 이른다. 단출한 건물 뒤편으로 거대한 마애불이 버티고 서 있다. 가까이 보기 위해 마애불 앞으로 올라가 안내판을 쭉 훑어본다. 안내판에는 '덕주공주가 오빠인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적혀있고,작은 건물 안에서는 비구니 스님의 목탁소리와 불경 외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
마애불 옆으로 돌아 오르니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된다. 고도가 높아졌지만희뿌연 안개와 구름 때문에 조망은 시원찮다.
덕주사 바위능선
가파른 계단 모두 끝나니 능선을 따라 평탄한 길로 이어진다.
너무 힘들게 오른 탓인지, 영봉으로 가는 길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동창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송계삼거리 지나고, 거대한 영봉을 맞이한다.
뱀이 똬리 틀듯 영봉을 휘감는 데크길과지그제그로 놓인 계단을 모두 통과하고 영봉에 이른다.
영봉으로 오르는 계단
인증사진 찍는 줄이 길지 않아서 다행스럽긴 한데, 주변 조망은 하나도 없다. 청풍명월의 멋진 조망을 기대했건만, 허망하고 날씨가 야속하다.
구름에 둘러싸인 영봉 옆 봉우리
월악산 정상
인증사진 한 컷 남기고, 중봉으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은 너무 질퍽하다. 기온이 높으니 얼었던 땅이 녹으며 미끄러워진 것이다. 아이젠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산악대장님 우려와는 달리 얼음은 없지만, 쩍쩍 달라붙는 진흙이 산행을 더디게 한다.
중봉
중봉 지나며 날씨가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청풍호 조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청풍호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마지막 지점이다. 오늘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래쪽 숲속으로 스며든다.
바닥은 질퍽하고 나무뿌리는 진흙을 덮어쓰고 무서운 모습을 숨기고 있다. 까딱 잘못하면밟고 자빠질 수 있는 상황이라 걸음걸이가 늦다.
버스가 4시 30분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보덕암에 도착하고, 건성으로 한 바퀴 휙 둘러본다.마당 가운데 벽돌로 층층이 쌓은 작은 탑이 서있고, 대웅전 지붕 위로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걸려있다.
수산리 마을에 거의 다 왔을 때 택시 한 대가 언덕길을 쏜살 같이 올라온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손님을 태우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친다. 이런 상황이 생긴다는 것을 기사님은 이미 알고, 덕주사 앞에서 명함을 나눠주셨을 것이다.
이 사람은 정해진 시간 내에 목적지까지못 갈 사람, 저 사람은 다리에 힘이 많이 남아있으니 30분 전에 도착할 사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다 하셨을 것이다. 아침에 받았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니 나도 모르게미소가 지어진다.
월악산 명품조망은 못봤지만, 가장 긴 코스를 시간 내에 완주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