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산행기
아! 이게 얼마만인가?
스키장에서 이렇게 눈을 밟아보는 게....
슬로프 타고 내려오는 스키어들과 제설기에서 뿜어내는 눈보라가 계곡을 가득 채우며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중천에 떠오른 해는 따사로워 보이지만 계곡의 공기는 차갑다. 슬로프 뒤로는 웅장한 덕유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고, 정상부는 눈이 쌓인 듯 허옇게 보인다.
빨리 올라가서 설산의 경치를 보고 싶어 진다.
스키장 입구에는 리프트 타려고 대기하는 스키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먼저 올라갔던 사람들은 경사진 슬로프를 빠르게 내려오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멋진 풍경이다. 스키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예전 모습과는 달리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 달라진 풍경이기는 하나, 설원 위를 달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시원스러운 광경이다.
오래전 직원들과 함께 성우리조트에 스키 타러 가곤 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된 상황이다. 이젠 예전처럼 스키를 탈만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스키보다는 등산이 적합한 종목이 되었고, 슬로프를 질주하기보다는 곤도라 타고 올라가며 스키장을 구경하는 게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함께 온 네팔 산악회 회원들과 같이 스키장 앞을 가로질러 곤도라 타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줄을 서고 탈 차례를 기다린다. 그사이 산행대장님은 곤도라 탑승권을 끊어왔다. 시간이 지나며 탑승 대기자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그늘진 곳이라 그런지 발이 시럽고 온몸에 찬기운이 파고든다. 스키장 슬로프에 설치된 전광판은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곤도라 탑승 줄은 줄어들지 않고 몇 미터 앞에 멈춰 있다. 탑승을 돕는 직원은 곤도라 점검 중이라 15분 정도 지연된다고 안내를 한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곤도라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곤도라 점검으로 인해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탑승을 기다리는 고객들은 참고하시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탑승을 포기하고 그냥 가라는 이야기인지, 계속 기다리라는 말인지 애매모호한 내용이다. 곤도라 비용을 환불해 주겠다는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예 운행을 못하는 것은 아닌 듯해 보인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곤도라에 탑승했던 승객들을 모두 내려 드리고, 벨트 교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상황을 알려주신다.
직원들은 탑승을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따뜻한 커피도 나눠주며 마음을 달래 보려고 노력하지만 뼛속까지 몰려드는 추위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다. 이러다가 몸살 나서 드러눕는 것은 아닌지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상황이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 기다리면 좋겠지만 보수작업이 끝난 뒤 사람들이 몰려들면 까딱 잘못하다간 대기줄 맨 뒤편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듯 보기에도 길게 늘어선 줄이 10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발바닥이 얼어서 감각이 없고 동상이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쯤 곤도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승객들이 탑승한다.
10시에 줄을 서기 시작했으니 거의 1시간 30분을 추위에 떨며 기다린 셈이다.
곤도라가 정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탑승을 대기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멀어진다.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기 시작할 때 눈앞에 상고대가 펼쳐진다. 앙상한 나무들이 하얀 눈가루를 덕지덕지 붙이고 빽빽하게 서 있다. 불과 몇 분 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니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설천봉 정상에 다다를 때쯤 곤도라 아래로 사용하지 않는 듯한 슬로프가 보인다. 아직 개장을 안 한 것인지, 사용을 중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잡풀 위로 눈이 덥혀 있고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시설 좋은 스키장만 눈에 들어왔지만, 등산 마니아가 된 지금은 산림이 훼손된 모습이 먼저 보이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설천봉에서 시작되는 6.1km 국내 최장 코스가 있다고 하더니 저 코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치렀던 곳이고,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평창과 경쟁을 벌였던 국가대표급 스키장이지만, 이토록 멋진 산을 통째로 생채기 낸 것에 대해서는 큰 아쉬움이 느껴진다.
인간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곤도라를 한 번 경험하면 저 아래서 여기까지 걸어서 올라오기는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인간의 편안함과 경제적 이득 등 복잡한 문제로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다른 몇몇 산에 케이블카 설치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겪는 사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역 상황에 따라 결론은 다르겠지만 개발에 따른 환경문제는 꼼꼼하게 체크하여 합리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물려주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어야 멋진 산 구경하며 오래오래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20분 정도 짧은 곤도라 여행을 마치고 설천봉에 내린다.
공기가 차갑지만 조망이 훤하니 기분은 상쾌하다. 가까이서 보는 상고대 멋진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주변의 경치를 살핀다. 저 아래쪽의 밋밋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이 절경을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최고봉인 향적봉(1,614m)으로 향한다. 등산로를 따라가며 눈꽃 터널이 만들어져 있고, 봉우리 전체가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다.
아! 멋지다.
이게 덕유산 눈꽃 산행이구나....
향적봉 정상에는 인증사진을 찍는 산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잠시 장갑을 벗으니 손가락이 떨어질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정성석 인증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추위에 더 서 있을 수 없어 서둘러 중봉 방향으로 이동한다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도 눈꽃이 활짝 폈다. 아고산대(亞高山帶) 생태계 대표 수종인 구상나무와 주목 등 침엽수림이 눈을 덮어쓰고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향적봉 오를 때와는 달리 덩치 큰 나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1km 남짓 지나 중봉에 이른다. 남덕유산 방향으로 끝없이 뻗은 능선이 장관이다. 등줄기는 하얀 페인트를 뿌린듯하고, 산 아래는 아직 색을 칠하지 못한 누르스름한 모습이다. 여기가 덕유산의 자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다. 앞뒤 어디를 둘러봐도 거친 곳이 없는 부드럽고 웅장한 육산의 모습이다. 향적봉만큼 바람이 세지 않아 사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니 더 좋다. 발아래 동엽령으로 가는 능선은 흰색 페인트칠 위에 발자국을 남긴 것처럼 오솔길을 열어 놓고 등산객을 유혹하고 있다.
중봉의 시원한 조망 뒤로하고 발길을 구천동 방향으로 돌린다.
여기서부터 버스가 있는 곳까지 계속 내리막이지만 꽤 긴 거리라 서둘러 가야 한다.
내리막길 한참을 내려와 오수자굴을 만난다. '오수자'라는 스님이 득도를 하셨다는 곳이다. 굴 내부로 들어가니 바닥에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이 보인다. 추운 날씨 탓에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으며 불쑥 솟아난 얼음 덩어리다.
다시 구천동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내리막길이지만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고 진행이 더디다. 주변 경치는 볼 겨를 없이 땅바닥만 보고 걷기에 급급한 상황이 이어진다. 울퉁불퉁한 돌길이라 자빠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조심스럽다. 곤도라가 설치된 반대편 능선과 달리 자연 그대로 모습이 대조적이고 지나는 사람도 몇 안 되는 청정 등산로다. 지역경제를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설천봉 출입인원 제한을 통해 자연환경 훼손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계곡을 따라 한 시간여를 걸어 법륜사 앞에 이른다. 구천동 계곡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평탄한 임도길을 따라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기도 하다. 사찰 앞마당을 가로질러 설천봉으로 오를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지나는 곳이다. 사찰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서 설천봉에서 내려오는 산객들이 계속해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건성으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구천동 계곡을 따라 서두른다. 얼른 가서 식사라도 하려면 급히 가야 한다. 계곡 건너편으로는 '구천동 어사길'이라 적힌 숲길이 있지만 넓은 도로길을 따라 뛰다시피 후다닥 내려간다.
추운 날씨 속에 긴 산행으로 지쳐서 그런지 경치는 눈에 드는 게 없고, 구천동 33경 안내판만 계속해서 보인다.
대충 봐도 200미터 간격으로 하나씩 서 있고 이름도 다양하다. 31경 이속대, 30경 연화폭, 29경 백련담, 숫자가 줄어들며 아무개 암(巖), 아무개 담(潭), 아무개 대(臺)가 계속되지만 안내판에 적힌 숫자를 보며 남은 거리를 가늠할 뿐이다.
'호랑이가 미끄러져 낙상을 당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호탄암(제 23경), '사자가 목욕을 즐겼다.'는 사자담(제 17경)까지 스토리텔링을 통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로 계속 가면 마지막에는 구천동 제1경에 다다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제1경은 그 유명한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신라와 백제의 통문인 것처럼 게재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 터널은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건설하며 일제가 뚫은 것으로 밝혀지며 교과서에서 사라지기는 했다.
1960년대 초 무주구천동 관광지 개발을 위해 '기니미굴'을 나제통문(羅濟通門)으로 이름 지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탐방안내소 지나 곧 산악회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고 허기라도 채울 겸 근처 식당으로 들어간다.
산행 전에 맛집을 검색하며 "맛있는 거 먹어야지...." 생각 했건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입구에 작은 수족관이 있는 집으로 든다. 구천동 송어가 유명하다는 말씀을 건네오지만, 아쉬움만 남긴 채 덕유산 산행을 마무리한다.
2021.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