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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일 Jul 17. 2022

금오산

금오산 산행기

'우리 열차 잠시 후 구미역에 도착합니다.'


승무원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 풀었던 등산화 끈을 조이며 내릴 준비를 서두른다.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며,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내륙 공업도시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그 시절 수출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며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또 인재가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구미)에 있다'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큰 인물이 많았다.


택시는 금오산 입구로 접어들고, 메타스퀘어 가로수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삼십 년 전에도 똑같은 자리에 있었을 터인데, 그 시절에 눈에 띄지 않던 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은 아무래도 오십 줄에 들어선 나이 탓일 것이다.

메타스퀘어 가로수 길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산행으로 단련된 체력 자랑이라도 하듯 앞서 가는 등산객들 하나 둘 제치며 빠른 걸음으로 오른다.


한달음 올라 쉴 참에 이르니, 떨어지는 폭포수가 햇빛에 부서지며 앞을 가로막는다. 벼랑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냉기를 뿜어낸다. 

미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에 대혜(大惠) 폭포로 불리며, 박정희 대통령이 폭포 아래 깨진 유리조각을 주웠던 일을 계기로 자연보호운동 발상지가 되었다 곳이다.

대혜폭포

이번에는 폭포 오른쪽 바위길을 힘겹게 올라 커다란 굴 안으로 든다. '도선 대사가 도를 깨우쳤고, 길재 선생도 이곳에서 은거를 했.'라고 전해지는 도선굴이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굴이 있는 것도 신비롭지만, 굴 내부에서 외부로 보이는 조망 너무 아름답다.

도선굴

굴을 나와 다시 산정으로 향한다. 금오산 등산코스 중에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는 할딱 고개로 이어진다. 전망대에서 잠시 숨 고르고, 정상을 향해 오르니 돌계단과 흙길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다행히 등산로 중간중간에 구미시내가 보이는 조망터가 있어 지루함을 달랠 수 있다.


등산스틱에 의지하며 두 시간 사투 끝에 정상에 오른다.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우리를 반긴다.


근대화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삼성, LG 등 많은 기업이 입주하며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국가공단이 산 아래 펼쳐져 있다.

그 옛날에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기름진 옥토가 넓게 펼쳐지고, 뒤에서 금오산이 아늑하게 품어주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마을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무학대사가 금오산을 보고 '왕기()가 서린 '이라 말했던 것처럼, 대통령 두 명이나 배출한 명산이 아닌가. 오늘은 내가 명당의 혈(穴)이 시작되는 현월봉(懸月峰) 정상에 왔으니, 이 산의 좋은 기운 듬뿍 받아 갈 것이다.


도심과 산이 어우러진 에 넋  멍 때리는 사이, 시원한 봄바람 등줄기에 흐른 땀방울 모두 훔쳐간다.

약사암

하산길은 약사암 지나 마애여래입상 방향으로 향한다. 산 옆구리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자연암벽 모서리에 조각된 '마애여래입상'을 만난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모습에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지난다.

마애여래입상

이번에는 탁 트인 바위 끝자락에 정성 들여 쌓은 돌탑들이 나타난다. 누가 이런 곳에 이 많은 돌탑을 쌓았을까?


돌탑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는 뇌병변 장애를 앓는 형석이란 아이가 금오산 근처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전 10살의 어린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형석이를 돌보던 할아버지는 너무 큰 슬픔에 빠졌고, 손자를 못 잊어 매일 이곳에 올라, 먼저 떠난 손주를 생각하며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몸이 불편한 형석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 이름을 금오산의 오자와 형석의 형자를 따서 '오형 학당'이라 이름 짓고 하늘나라 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 보내기를 기원하며 돌탑을 쌓다.


손주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할아버지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돌탑에 이렇게 적었다.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떨어질까 무너질까

잡아주 받쳐주며

비바람을 이불 삼아

산님들을 친구 삼아

깨어지고 부서져서

모래알이 될 때까지

잘 가라 띄워보내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 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고 싶다.

석아...


오형 돌탑

돌탑을 돌아 계곡 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오를 땐 숨 할딱거리며 가파른 언덕을 원망했었지만, 내려가는 길은 도가니에 충격이 오는 것을 걱정한다.


그런들 어쩌겠나. 나이를 탓하며 조심조심 내려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계곡으로 내려 해운암 앞에 이르니 나옹 선사(懶翁 禪師)의 '청산은 나를 보고' 시구가 눈에 든다. 올라갈 땐 정신이 없었지만, 내려가는 길은 시 한 수 읊을 여유가 생겼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언제 봐도 정말 대단한 문장이다. 원문을 보고 한 자 한 자 음미할 정도는 못되지만, 번역된 한글로 읽더라도 나옹은 대단한 스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번뇌와 생사를 초월한 신선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다. 한 자 한 자 우리 민족 정서를 담은 예술작품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 들어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청산가' 가곡으로 재탄생했고, '훨훨훨' 이란 트로트 곡으로도 불렸다.

최근엔 트로트 가요 프로에서 앳된 여학생이 간드러지게 불러 인기를 끌기도 했다.

700년 전에 쓰인 시가 지금 세대에도 통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천년이 지나서도, 누군가 리메이크(remake) 작품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옹선사는 시대를 초월한 천재였던 것이다.


靑山兮要我以無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而無憎兮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靑山兮要我以無齬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聊無怒而無惜兮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강같이 구름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해운암 앞 나옹 선사 시

"사랑도 미움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 아~ 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하네" 트로트 한 곡조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한다.  


202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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