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과 등산객들모두 쉬어가는 운두령(雲頭嶺)이지만, 바람만은 쉬지 않고 풍력발전기를 세차게 돌린다.
지난겨울에 느꼈던 공포스러운 바람소리는 아니지만, 쉬이익 ~ 쉬이익 하늘을 가르는 소리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계방산 입구(운두령)
잠시 뒤 물푸레나무 군락지 안내판이 나오고,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희끗희끗하게얼룩진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밭에서 찬바람 맞으며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단함이 느껴진다.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변해서 물푸레나무라 부른다.동의보감에 '나무껍질을 우려낸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을 밝게 하고, 두 눈에 핏발이 서고 아픈 것을 낫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안약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도낏자루, 도리깨 등 농사도구로도 사용되었으니 쓰임새 많은 고마운 나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파리 하나 달지 않은 앙상한모습은 그저 그런 나무로 비치며산객들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죄인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관아에서 죄인의 볼기짝을 내리치던 곤장이'물푸레나무'로 만들어졌고,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로 많이 사용되었다. 훈장님 회초리나 관아의 곤장을 맞아 본 경험이 없으니 얼마나 아픈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을 살았더라면 모르긴 해도 많이 맞았을 것 같다.
물푸레나무 군락
물푸레나무로 만든 곤장은 너무 고통이 커 한 때 버드나무나 가죽나무를 쓰기도 했지만, 죄인들이 자백을 잘하지 않아 다시 물푸레나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예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강희맹은 '죄인이 참으면서 조금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니, 버드나무나 가죽나무 말고 물푸레나무를 사용하게 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물푸레나무 몽둥이가 최고였던 모양이다.
또 요즘에는 프로야구 선수들 야구방망이로 많이 쓰이고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100년 넘게 물푸레나무가 사용되고 있다니, 오랜 기간 쓰임새 있는나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탄한 능선길 걷고 가파른 언덕길 오르기를 두어 번 반복하니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 올라선다.
북쪽으로 저 멀리 설악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오대산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맑은 하늘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과 겹겹이 쌓인 산들이 까마득히 보인다. 아! 여기도 정말 멋지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방산 정상
새로 만들어진 정상석도 보인다. 작년에 왔을 때는 한글로 '계방산'이라 적혀있었는데 지금 보니 한자로 "桂芳山"으로 새겨져 있다. 계수나무 계(桂) 자에 꽃다울 방(芳) 자를 썼다. 계방산에는 떡방아 찧는 달나라 토끼 설화에 나오는 전설 속 계수나무가 있는 것일까.
계방산 정상
칼바람과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정상을 벗어났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조용하다.주변 풍광을 실컷 구경하고 주목 군락지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오던 등산로와 달리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다. 겨울산행의 재미를 쏠쏠하게 느껴진다. 이번에는 몸통에 붉은빛을 띠고 이파리가 짙푸른 주목들이 나타난다.
주목 군락지
지루한 노동계곡 끝나고 이승복 생가가 보인다.
국민학교 시절 도덕 교과서에서 봤던 이승복 어린이가 살던 집이다.
이승복 생가
교과서에 실렸던 이승복에 관한 내용은 그 시절 국민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아는 내용이다. 반공사상 고취가 중요했던 시절이라 반공 웅변대회와 반공 글짓기 대회가 열렸고 학교마다 이승복 동상이 세워졌다.
무장공비가 수시로 출몰하며 국가 안보를 위협하던 시절이라 도덕, 바른생활 교과서에는 무장공비와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삐라를 주워 파출소에 가져다주면 순경 아저씨가 연필이나 공책으로 바꿔 주던 시절이었으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 때에는 혹 달린 김일성 모형을 만들어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희한한광경이었지만, 국가안보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시절이라 흔히 볼 수 있는모습이었다.
90년대 들어 많은 학교에서 이승복 동상이 철거되었고, 교과서 개편 때 이승복과 무장공비 관한 이야기는 빠졌다.
누군가 장난삼아 지어 낸 이야기겠지만, 무장공비가 건넨 건빵봉지 속별사탕을 보고 "나는 콩사탕은 싫어요"라고 말을 했는데, 앞니 빠진 이승복 어린이의 발음이 시원찮아 '나는 공산당은 싫어요'로 들렸고, 이 말에 화가 난 무장공비가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헛웃음 쳤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 흘러 그것도 뼈 있는 농담처럼 들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민간인이 무장공비에게 잔혹한 죽임을 당한 이 일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분단국가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바른 생활 6 - 2(1974년)
이승복 생가를 나와 버스가 대기하는 아랫삼거리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옛날 이승복 어린이도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에 다니던 시절 이길을 아침저녁으로 오갔을 것이다.
어머니가 뜨개질로 손수 만들어 주신 모자를 눌러쓰고, 책보자기는 허리춤에 질끈동여맨 채 제잘 거리며 10여 리 길을 등교하는 모습은 나의 어릴 적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산행 종점인 아랫삼거리에 이른다. 아침에 타고 온 버스를 보니 허기가 몰려온다. 콩가루 냄새 그윽한 송어회 한 접시를 안주 삼아 함께한 분들과 막걸리잔 기울이며 계방산 산행의 또 다른 재미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