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예산에 있는 덕숭산은 495미터 나지막한 산이며 수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꾼들에게는 한나절 깜도 안 되는뒷산 수준이지만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올라 있다.
그리고천년고찰 수덕사를 품은 덕에더빛을 낸다.
현대에 들어 덕숭산과 수덕사가 유명세를타게 된것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일엽 스님의 책이 한몫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래의 모델이 수덕사에서 출가한 일엽 스님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비구니가 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수덕사의 여승'은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속세의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여승의 심정을 표현한 가사가 애절하다.
한 때 수덕사 앞 마을에 노랫말을 담은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나, 누군가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1967년 발표된 이 노래는 무명가수 송춘희 씨를 일약 스타로 만든 곡이다.
"아아 ~ ~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 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었네
아아 ~ ~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수덕사 일주문 지나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어 수덕여관 앞에 이른다.
덕숭산 일주문
여관은 공사 중인 듯 초가지붕 위로 비닐이 씌워져 있고, 대문 오른쪽에는 이응로 화백이 썼다는 '수덕여관'현판이 예사롭지 않다.
수덕여관 안내판 내용에 따르면 1944년 이응노 화백이 매입하여 6.25 때 피난처로 사용했으며,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 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잠시 머물며 뒤뜰 바위에 암각화 2점을 남겼고,그가 떠난 후에는 이화백의 전 부인이 여관으로 운영을 했다고 한다.
수덕여관
우리나라 근현대 예술가의 혼(魂)이 깃든 수덕여관은 문학가이며 화가로 활동하며 신여성으로 평가 받았던 나혜석이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혜석이란 이름은 나에게도 아주 친숙하다. 그녀의그림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수원 인계동 '나혜석 거리'에서 자주 술자리를 갖곤 했기에 이름 석자는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산속 허름한 여관에서 오랫동안 기거하게 되었을까.
알려진 사연에 따르면 남편과의 결혼과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쓴 '이혼 고백서' 발표로 파문을 일으켰고, 경제적 궁핍으로 친구 일엽 스님이 있는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나혜석은 만공스님을 만나 속세를 떠나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수덕여관에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겉모습은 허름하지만 일엽 스님, 이응노 화백 등우리 근현대사 문화계를 주도한 거목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곳이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측면
수덕사 경내로 들어 사천왕문, 황하정루 지나 돌계단 올라서니 정면으로 대웅전을 맞이한다. 마당 중앙에는 3층 석탑이 빈 공간의 허전함을 메우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여기가 이 절에서 가장 좋은 자리이며 대웅전에 앉은 부처님 시선 아래로 사찰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가 아닌가 싶다. 놓인 위치뿐만 아니라 건축물 자체로도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다. 1308년에 건립된 목조건물로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목조건축물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맞배지붕 형식의 대웅전은 언제 보더라도 직선의 간결한 멋이 있다. 용마루가 높이 솟았고 처마는 아래로 길게 뻗어 있으니 정면에서 보는 모습은 마치 투구를 눌러쓴 장수처럼 위압감이 느껴진다. 건물 높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한 지붕은 무거워 보이고 아랫부분이왜소해 보이는 면이 있기는 하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굵은 기둥은 안정감뿐만 아니라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나무 기둥옆으로 돌아 측면에서 보니 정면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지붕 무게감에 대한 우려는 말끔히 해소된다. 기둥과 보가 놓인 모양만으로도 과학적인 설계를 통해 하중을 분산하여 중량에 대한 부담을 줄인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뼈대가 눈에 띄게 드러나 보이는 측면의 모습 또한 정면 못지않게 아름다움과 멋이 있다.
그런데 대웅전 부처님이 앉은 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조망은 너무 아쉽다. 황하정루 지붕이 시선을 반쯤 가리며 조망을 훼손시켰다. 100점짜리 국보급 조망을 낙제점으로 떨어뜨린 것 같은 아쉬운 장면이다.
만공탑과 관음보살입상
소림 초당
대웅전 옆으로 돌아 드니 정상으로 향하는 1086돌 계단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수덕사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이 수없이 오르내렸을 이 돌계단을 구도(求道)의 길을 가듯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며 정상으로 향한다.
한참을 올라 계단이 끝날 때쯤 바위 절벽움푹한 곳에 얹힌 초가 한 칸이 보인다. 저기가 만공스님께서 주석하셨다는 소림 초당이다. 저런 초가집에 머물며 불경이라도 외면 속인(俗人)도 금방 득도(得道)를 할 것 같은 멋진 곳에 자리 잡은 아담한 집이다.
계단을 따라 몇 발짝 더 오르니 이번에는 거대한 석불을 마주한다. 1924년 만공스님께서 바위를 깎아 세운 '관음보살입상'이다. 2중으로 된 갓을 쓴 모습이 특별한 모습이다.
석불 왼쪽으로 돌아 조금 더 오르면 만공스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만공탑이 세워져 있고, 탑 뒤편 언덕 위로는 정혜사가 보인다.
수덕사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비탈에 세워져 풍광이 좋다고 알려진 곳이다. 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대문 틈 사이로 내부를 기웃거려 보지만, 어쩐 일인지 출입문이 꼭 잠겨있다. 담너머로 내부를 살펴봐도 인기척 없고 조용하니 절 구경은 포기하고 아쉬운 걸음을 옮긴다.
이번에는 제법 큰 밭이 보인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잘 가꾸어진 밭이라니...." 알고 보니 여기가 일엽 스님이 삭발하고 출가했던 견성암이 있던 자리란다.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던 절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채소를 가꾸는 밭으로 변해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래 가사의 모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일엽 스님은 192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新女子를 창간했고 자유 연애론, 신정조론을 외치며 당시 보편적인 사회 관념에 반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숱한 화재에 올랐던 신여성이었다. 잘 나가던 신여성 김일엽이 만공스님의 불력에 감복하여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사연이 있는 곳이다.
일엽이 이곳에서 정진할 때아들이 찾아왔지만 어린 아들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나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에 온 스님이다.'라고 냉랭하게 말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모와 자식 간의 연(緣)을 끊는 일엽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도 다시 속세(俗世)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는 불심(佛心)에서 우러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 불심(佛心) 덕분에 흔들림 없이 정진하며 칭송받는 비구니의 삶을 살다가 이곳 견성암에서 입적했다.
견성암 절터
밭 가장자리를 둘러친 울타리 돌아 오르니 우뚝 솟은 바위에 이른다. 바위에 올라 지나온 수덕사 계곡을 내려다보며 한 숨 돌리니 곧 정상에 이른다.
널찍한 공간에정상석하나 서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사방으로 터진 조망이참 좋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짧은 거리였지만 고승(高僧)의 불심과 예술가들의 체취를 느끼느라두 시간은 족히 걸린 듯하다. 그 옛날 그들도 가끔은 이곳에 올라 바깥세상을 바라보며탁 트인 경치를 즐겼을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오늘은 이렇게 바꿔서 적어 보고 싶다. "산은 낮아도 불심과 예술은 깊다." 개똥철학 같은 소리지만 수덕산 계곡에 살다 가신 그들의 生은 짧았어도 흔적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