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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일 Mar 24. 2022

쫓비산 매화 향기

쫓비산 산행기

봄이 왔다.

선비들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매화구경을 나서듯 화사한 등산복 차림으로 쫓비산 탐매()를 떠난. 어제까지 봄비가 내렸던 탓에 이제야 산행을 떠나니, 활짝 핀 매화에 대한 기대감 더 커졌다. 월급쟁이로 사는 인생이기에 여행이나 운동은 토요일에 몰아서 하고, 일요일은 푹 쉬는 게 나만의 루틴이지만, 매화꽃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으니 일상적인 패턴을 벗어나 전라도 광양 땅으로 향한다.


매화는 사군자로 불리는 매난국죽(梅蘭菊竹) 중에 제일 앞에 놓이며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 눈이 다 녹기도 전에 꽃을 피워 雪中梅 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시와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이다. '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했으니 선비정신과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매화를 노래한 수많은 선비들 중에 퇴계만큼 각별한 이도 없었다. 매화시 91수를 모아『매화 시첩』을 남겼을 정도 매화사랑이 남달랐다. 그를 모델로 삼은 천 원짜리 지폐에도 매화 들어 있다.

지폐 속에 핀 매화

퇴계가 이토록 매화를 좋아했던 사연은 단양 장회나루에 전해지는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잘 알려져 있. 그뿐만 아니라 퇴계의 마지막 유언 ' 매화나무에 물 줘라'라는 말씀은 매화사랑 대한  가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폐 속에 활짝 핀 청매는 450여 년 전 향이 퇴계와 이별하며 선물로 줬던 그 매화분을 떠오르게 한다.


매화는 화투장에도 그려져 있다. 2월을 상징하는 매화내려앉은 열 끗짜리 꾀꼬리와 다섯 끗 홍단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고돌이를 맞추면 단번에 5점을 내며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고, 홍단도 노려볼 수 있으니 고스톱 판에서는 인가 좋은 패다.


예전엔 가(家) 문상이라도 가는 날은 고스톱 한판 게까지 있어 주는 게 상주에 위로 친분의 표시였지만, 지금은 화투 치는 상객 보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부고장에 '마음 전하실 '이라며 계좌번호 적는 게 필수 항목이 된 지도 오래다.

2월  매조

활짝 핀 매화를 상상하며 자는 둥 마는 둥 선 잠을 자는 사이 버스는 관동마을에 도착다.

마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 쫒비산으로 오르는 산비탈 매화꽃으로 하얗게 덮여있다. 매화()가 활짝 핀 마을 가운데를 지나 등산 시작된다. 매화(花)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대부분이 하얀 꽃잎이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살짝 내비치는 꽃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받침이 옅은 초록색을 띤 청매화임을 알 수 있다. 매화라고 해서 다 같은 매화가 아니 홍매, 백매, 청매 등 종류만 해도 15종에 이른다고 한다.


매화 군락을 지나 30분 남짓 가파른 언덕을 올라 고갯길에 이른다. 이정표에 게밭골이라 적혀있, 쫓비산과 백운산으로 통하는 갈림길임을 알리고 있다. 잠시 한 숨 돌리고 쫓비산 방향으로 다시 언덕을 오르니 갈미봉 이르고 조망이 시원하게 터진다.

앞으로 섬진강 줄기가 한눈에 들고, 뒤로는 백운산 상봉 눈 쌓 모습보인다. 거기에다 시원한 봄바람까지 불어 주니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낀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비산 방향으로 급히 이동한다. 능타고 가는 길 내내 섬진강 줄기가 보이니 지루하지 않게 최상급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오르락내리락 작은 봉우리를 몇 번 넘으니 쫓비산이라 적힌 정상석이 보인다.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쫓비산'은 봉우리가 뾰족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 찍는 사람들과 데크 위에서 음식을 드시는 분들 인해 시골 장날 같은 시끌벅적한 모습이지만 정감이 넘쳐 보인다.


동쪽으로 보이는 정상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전라도 경상도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이 있어 이곳 풍광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재첩 채취로 유명한 저 강줄기는 어디 메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만, 아마도 저 위쪽에 있는 지리산 옆을 돌아 이곳에 이르고, 광양만 바다로 흘러들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답을 내며 머릿속에 그려 본다.


여기는 전라도 광양이고 저 건너편은 경상도 하동 땅이란다. 지역 주민들에게 섬진강이란 어떤 존재일까?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처럼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 4대 강에 이름을 올리지 못지만 아름답고 멋진 강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섬진강 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좋은 모습 눈에 가득 담고 다시 매화마을로 향한다.

쫓비산 정상

완만한 내리막길 한참을 걸어 청매실농원 뒷산에 이른다. 매화마을 전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포인트 여겨지는 곳이다. 산객들은 탄성 쏟아내며 화꽃으로 가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군데군데 홍매화가 활짝 펴 멋을 더했고, 주차장엔 상춘객들 차량들로 꽉 들어찬 모습이다.

청매실농윈 마당을 가득 채운 옹기도 까마득히 눈에 들어오고, 마을로 가까이 내려가며 매화향기에 빠져든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매화마을과 섬진강

이 모든 것을 홍쌍리 명인께서 만들었다는 게 더 놀라운 사실이다. 스물셋에 이곳으로 시집와 55년째 매실 농사를 짓고 계신다고 한다. 처음 시집 올 때는 대부분 밤나무였지만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실나무를 심으며 매화마을로 변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열정과 끈질긴 노력이 이렇게 큰 변화를 이끌어 냈다.


홍쌍리 여사는 매실에 반해 매실나무를 심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화꽃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실제로 금전적인 수익을 내고 이 마을을 변화시킨 원동력은 매화꽃이 아니라 매실이라는 생이 든다.

처음 매실나무를 심을 때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하셨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매화꽃 마케팅을 통해 큰 수익을 내는 기막힌 영업전략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매화나무에는 매화도 있지만 더 중요한 매실이 있으니 말이다. 꽃을 먼저 떠올리면 매화나무 부르지만, 매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 매실나무라고 부르게 된다.

옛 성현들도 매화꽃을 어여삐 여겼으나, 매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화투장이나 천 원짜리 지폐 어디에도 매실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일찍이 매실의 상품성을 알아보고 농원을 일궈낸 한 여인의 노력과 능력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매화숲
초가 앞 활짝 핀 매화
매화나무 꽃밭에서 사진촬영하는 나들이객

청매실농원 앞마당에 이르니 매실을 숙성하는 전통 옹기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하고 있다. 수많은 항아리를 한 곳에 모아 놓아 진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방문객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럽에 포도주 숙성하는 오크통이 있었다면, 우리라엔 흙으로 빚은 옹기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청매실농원 매실 장독대

마을 어귀로 내려오니 섬진강 강변의 봄 경치 또한 너무 좋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선생님의 '봄날'을 읊어 본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거라  


이렇게 올해의 봄날이 지나고, 내년에도 어김없이 매화꽃이 피겠지. 내년에는 우리 죽마고우 손 잡고 또 찾아올 거야....

매화차

202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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