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는 것도 산마다 가야 할 시기가 따로 있다. 황매산은 철쭉이 만개하는 지금이 딱제철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한국의 사계절' 봄 편에 소개되었던 황매산 철쭉이 장관을 이루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3년째 철쭉 축제가 취소되었지만 매년 이맘때면 철쭉을 만나러 전국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소백산, 지리산 바래봉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철쭉 군락지로 평가받고 있으며, CNN이 선정한 한국관광 50선에 선정되기도 했던 철쭉꽃 명산이다.
아침나절 내내달려온 버스는 떡갈재 고갯길에 산객들을 내려놓는다.
산행 들머리부터 깔딱 고개로 이어진다. 힘에 부치지만 좁은 등산로를 줄지어 가는 길이라계속 걷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40여 분을 쉼 없이 걸어너백이쉼터로 불리는 능선에 올라선다. 재미난 이름이지만 어떤 깊은 뜻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능선길을 따라가며 철쭉나무가 양쪽 옆으로 펼쳐진다.
아쉽게도 꽃은 시들었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5월 첫째 주 일주일 동안 15만 명 넘는 산객들을 맞았고, 지난 주말 철쭉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들로 인스타그램을 후꾼 달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변했고, 그 아름답던 철쭉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시들어버렸어...." 이럴 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제격이다.
정상에 이르니 여기도 인증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레깅스 입은 젊은 산객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건지려는 듯 바위 위에서 몇 번씩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보인다.
흙먼지와 몰려드는 산객들로 더 지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시원한 봄바람 한 번 크게 들이켜고 황매평전 방향으로 길을 재촉한다.
아래쪽으로 한달음 내려와 건너편 봉우리에 올라서니, 정상 바위 주변에 핀 철쭉꽃과 바위를 오르는 산객들이어우러져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벼랑 위에 핀 철쭉꽃을 구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불렀다는 '헌화가'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황매산 정상 철쭉꽃과 등산객들
때는 신라 성덕왕 시절 수로부인이 태수로 부임받은 남편 순정공을 따라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바닷가 산아래서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던 중 절벽 위에 활짝 핀 철쭉꽃이 수로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철쭉꽃의 아름다움에 반한 수로부인은 '저 꽃을 꺾어 줄 사람이 누가 없느냐?'라고 주변에 말한다.
높고 위험한 절벽 위에 있는 꽃이라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고, '도저히 사람이 오르지 못하는 곳이라 꽃을 가져올 수 없다.'라고 함께 행차하던 이들이 아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벼랑 위에 핀 철쭉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검은 소를 몰고 지나던 노인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절벽 위 꽃을 구해 수로부인에게 바친다
자줏빛 바위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수로부인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길래 노인조차 위험을 무릅쓰고 벼랑 위에 올라 철쭉을 꺾어 바쳤고, 바닷속 용왕님도 부인을 납치했을까?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수로부인에게 바친 그 꽃이 바로 철쭉꽃이었다니, 철쭉이야말로 태고적부터 미(美)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수로부인의 아름다음도 황매산의 철쭉처럼 한 때였을 터이지만 말이다.
능선 따라 걷다 보니목장처럼 드넓은 거대한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주에 인터넷을 통해 봤던 대평원의 모습이다. 활짝 핀 철쭉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던 꽃밭은 이미 식었고, 한바탕 난리 뒤에 찾아오는 휑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꽃은 시들었지만 이토록 넓은 철쭉 군락지가 산 꼭대기에 생겼다는 게놀라운 일이다.
1970년대 이곳에 대규모 목장이 조성되었고,젖소와 양들이 독성이 강한 철쭉만 남기고 주변의 수풀을 뜯어먹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었다. 그 후 낙농 농가들이 떠나며 '지금의 독특한 경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매 평전
철쭉 사이로 잘 만들어진 데크길을 따라 내려가며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봄바람을 함께 맞이한다. 서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을 배경으로 황매 산성이 꽤 운치 있게 시야에 들어온다.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니 시원한 조망이 또 한 번 멋지게 터진다. 지나온 길과 내려갈 코스 양쪽 모두 훤하게 보인다. 잘 다듬어진 산길을 따라가며 산등성이를 타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왼쪽 옆으로는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진 예사롭지 않은 단층 건물이 보인다.
올해 공간문화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한 ‘철쭉과 억새 사이' 휴게소라고 한다. 멀리서 보기에도 주변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황매평전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로 느껴진다.
철쭉과 억새 사이 휴게소
모산재와 덕만주차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모산재로 발길을 옮기니 이내모산재임을 알리는 작은 돌비석앞에 마주 선다.
지금까지 황매산 느낌과 전혀 다른 색다른 풍경이다. 앞부분이 철쭉으로 덮인 온순한 육산이었다면, 이곳은 거친 화강암으로 멋을 부린 바위산의 얼굴이다.
아래쪽으로 한 걸음 더 내려가니, 돛대바위 능선과 산아래 저수지까지 한눈에 보이는 조망터가 나타나고, 거대한 고래등처럼 길게 뻗은 바위능선이 산아래로 흐른다. 여기는 황매산이 아닌 신령한 바위산에 온 듯한 새로운 느낌이 드는 구간이다.
돛대바위 능선
바위 능선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니, 이번에는 갈라진 바위틈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여자 산객들 모습이 보인다. 순결 바위로 불리는 곳이며, 순결함을 테스트해 보는 곳이라고 한다. '평소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을 들어갈 수 없으며, 들어가더라도 바위가 오므라들어 나올 수 없다.'라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좁은 바위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는 여성 산객들이 줄을 섰지만, 요즘 세상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전설이다.
바위에 끼어 못 나오는 것은 순결이 아니라 비만이 원인이겠지만, 버거워 보이는 몸을 바위틈으로 억지로 쑤셔 넣는 한 등산객의 행동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산객의 행동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 표정도 재미있어 보인다. '뚱뚱한 사람은 위험할 수 있으니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주의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우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해 보며 마지막 하산길을 서두른다.
순결 바위
기대했던 황매평전 철쭉은 '화무십일홍'이 되었지만, 평원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조망, 그리고 흙산과 바위산을 두 번 타는 듯한 색다른 경험이 좋았다. '철쭉과 억새 사이'라는 황매산휴게소에 붙여진 이름처럼 억새풀로 뒤덮일 올 가을 황매산 정취까지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