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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이끼계곡

삼복더위에도 오싹한 원시림 계곡

by 하영일

가리왕산이란 이름은 고대(古代) 춘천지역에 자리 잡았던 맥국(貊國)의 리왕이 이곳에 피신하여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이곳에 활강 스키장이 건설되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베어지고, 산은 마치 이발기로 머리를 민 듯한 큰 상처를 입었다. 동계올림픽으로 인해 눈 덮인 겨울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여름 산행지로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이끼계곡의 서늘한 냉기가 땀을 식혀주고, 원시림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산삼이 많이 나는 산으로 알려져, 조정에서 이곳을 산삼봉산(山蔘封山)으로 지정하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산삼은 그늘지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대표적인 음지식물이다. 산삼이 잘 자라는 환경은 이끼가 번성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이끼는 태곳적부터 생존해 온 생명력 강한 식물로, 전 세계적으로 약 2만 4천여 종이 존재한다.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습한 곳에 서식하지만 많은 산소를 생산하고, 공기를 정화하는 유익한 존재다.


하지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을 보면, 이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속담은 '부지런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침체되지 않고 계속 발전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속담이지만 이 말의 어원은 고대 로마의 작가 푸빌리우스 시루스(Pubillius Syrus)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이 문장은 '자신의 사회적, 직업적 위치를 자주 바꾸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터전을 자주 옮기면 돈이나 친구를 얻기 힘들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옛날 사람들이 우리 보다 먼저 이끼(moss)가 돈이나 친구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셈이다.


장구목이 입구에 도착하니 이미 몇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차박을 한 듯한 등산객 한 분이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어제 일곱 시간 걸려서 다녀왔는데, 이끼계곡이 정말 예술입니다" 우리는 일곱 시간이란 말에 깜짝 놀라, 다시 차로 돌아가 물과 먹을거리를 더 챙긴다. '이건 보통 산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의 준비단히 한다.


우리는 도로 옆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1 폭포 앞에 이른다.

폭포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지만 시원한 냉기를 온몸으로 느낀 수 있다.

계곡물을 양손 가득 담아 얼굴에 몇 번 퍼붓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이 오싹해진다. 바로 이 맛이 여름 산행의 묘미이자 이끼계곡의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리왕산은 해발 고도 1,100미터 이상을 올려야 하는 거대한 산이다. 이끼와 시원한 물에 취해 여기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계곡을 따라가며 9 폭포까지 있다는데, 이제 겨우 첫 번째가 아닌가. 또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지 큰 기대를 가지고 발길을 재촉한다.


수풀이 우거진 좁은 등산로를 따라 오르며 파란 이끼로 뒤덮인 나무와 바위 사이로 맑디맑은 물이 흐르는 모습은 정말 신이 만들어 놓은 예술 작품이다. 그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런 모습은 정말 달력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귀한 풍경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끼계곡
이끼계곡

정상으로 가는 발길이 바쁘지만 계곡을 들여다볼 수 있는 포인트는 놓치지 않고 계곡 가까이 들어가서 파아란 이끼바위를 만져보며 물에 손을 담가본다. 이끼의 촉감은 부드럽고 차가운 계곡물은 한 바가지 퍼 마시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덩어리에도 이런 비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신기하다. 비록 좁은 국토지만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숨은 보석을 많이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 멋진 자연환경은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들의 책무이자 의무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할 산삼을 보호하기 위해 가리왕산 출입이 제한되었지만, 이제는 이끼를 보호하기 위해 출입 인원을 조절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끼가 산삼보다 더 이로운 식물일지 모른다.


이끼계곡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눈호강하며 산을 오른 지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전히 물소리가 요란하고 파아란 세상이 이어진다.

이끼계곡
바위를 덮은 이끼

출발지로부터 2km를 훌쩍 넘기면서부터는 물소리는 멀어지고, 대신 새소리와 곤충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계곡에서 멀어지며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게 느껴질 즈음 장구목이 임도에 도착한다.


이곳이 바로 정상까지 오르는 전체 코스의 절반 지점이다. 나머지 절반은 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임도 위로 난 언덕길로 접어든다.


예상했던 대로 가파른 언덕길이 나오고, 구들장처럼 널찍널찍한 바위계단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산이니,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하는 구간이다.


부지런히 올라보지만 앞서가는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내려오는 젊은이들만 마주친다. 그들로부터 정상 분위기를 전해 듣고, 우리는 아래쪽 이끼계곡의 멋진 모습을 자랑하듯 들려주며 각자의 길을 간다.


이번에는 주목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얇게 갈라진 바위가 시선을 끈다. 등산로 바닥 돌계단도 그렇고, 유난히 송판처럼 널찍한 바위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목

다리에 힘이 다할 즈음, 정상 삼거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정상까지 0.2km'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힘을 낸다.

등산스틱으로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나아가지만,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드는 구간이다.


고약한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조망터로 나오니, 나뭇잎 한 장 안 붙은 앙상한 고사목이 듬성듬성 서 있고, 발아래로 구름이 보인다. 이제야 비로소 1,500미터가 넘는 높은 곳에 올랐다는 실감이 든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었던지 고사목의 가지들은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무들은 한겨울 차디찬 북서풍을 이기지 못해, 따뜻한 남쪽을 향해 앞으로 나란히 하듯 가지를 뻗게 된 듯하다.

고사목과 운무

몇 발짝 더 옮기자, '가리왕산'이라 적힌 정상석이 눈앞에 나타난다. 2시간 50분, 힘들고 숨 가쁜 시간을 지나 마침에 해발 1,561m 정상에 닿았다. 엄청난 높이의 산답게,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이 멀리까지 보인다.

정상 한편에 쌓인 돌무더기 외에 특별함은 없지만, 중량급 산에서나 느낄 수 있는 광활한 조망이 압권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검푸른 능선이 고래등처럼 물결치며 사방으로 뻗어있고, 온몸을 감싸는 시원한 바람이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낸다.

등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은 이 맛에 산을 오르고 또 오른다. 가리왕산 꼭대기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은 저 아래로 보이는 경치와 시원한 이 산바람, 그리고 장구목이 이끼계곡의 신비로움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의 이 산행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 특별한 경험을 자랑삼아 이야기할 것이다.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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