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이란 이름은 고대(古代) 춘천지역에 자리 잡았던 맥국(貊國)의 가리왕이 이곳에 피신하여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이곳에 활강 스키장이 건설되었고, 주목, 음나무 등 아름드리나무가 잘려 나가며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마치 바리깡으로 머리 가운데를 밀어버리듯 산 꼭대기에서부터 아래쪽으로 훑으며 생채기를 냈다.
동계올림픽 개최로 눈 많은 겨울산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겨울보다는 한여름에 꼭 가봐야 할 여름 산행지로 더 사랑 받고 있다.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도는 초록색 이끼계곡과 원시림은 신비감마저 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때는 산삼이 많이 나는 산이라 하여 조정에서 산삼 봉산(山蔘封山)으로 지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산삼은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는 음지 식물이다. 유추해 보면 예전부터 습한 기운이 강해 이끼가 잘 자라는 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끼는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식물군이며, 종류만 해도 2만 4천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늘지고 습한 곳에 살지만 산소를 많이 만들어 내고, 공기정화와 습도 유지를 돕는 고마운 식물이다.
그런데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 속 '이끼'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뜻으로 인용되고 있다.
미국에도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란 속담이 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똑같은 말이지만, 사는 곳이나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는 사람은 재물이나 친구를 모으기 힘들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문장 속 moss(이끼) 라는 단어는 우리와는 반대로 돈, 친구 등 좋은 것을 뜻하는 긍정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미국 사람들이 이끼의 이로움에 대해 우리보다 더 일찍부터 알았던 것 같다.
예전엔 임금에게 진상할 산삼을 보호하기 위해 가리왕산 출입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이끼와 원시림을 지키리 위해 출입 인원을 제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어찌 보면 산삼보다 이끼가 인류에 더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는 식물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먼길 달려온 자동차가 장구목이 입구에 도착한다.
이미 서너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차박을 한 듯한 아저씨가 말을 걸어오신다.
1 폭포부터 9 폭포까지 이끼가 절경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어제 7시간 걸려서 다녀왔다는 말씀까지 덧붙이신다.
7시간이란 말에 물과 먹을거리를 배낭에 더 쑤셔 넣고, 서둘러 계곡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첫 번째 폭포에 도착하고, 시원한 냉기를 온몸으로 느낀다. 계곡이 뿜어내는 시원함이 이 산의 매력임을 깨닫게 해 주는 곳이다.
수풀이 우거진 좁은 등산로를 따라 오르며 작은 폭포가 이어진다. 폭포라 말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지만, 이끼 덮인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맑고 시원해 보인다.
계곡을 따라 오르며 들여다 보는 곳 마다 이끼가 다닥다닥 붙어서 온통 이끼세상이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신기한 모습이 계속된다.
흐르는 물로 얼굴과 목덜미를 적시니, 얼굴에 얼음장을 댄 것처럼 전율이 쫙 퍼진다.
신비함에 매료되어 폭포라고 적힌 포인트마다 발을 들여 카메라에 담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물소리 요란한 이끼계곡이 이어진다.
2km는 족히 지났을 즈음 물소리 대신 새소리와 곤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된다. 조금 더 힘을 내 장구목이 임도에 올라선다.
여기가 딱 절반 정도 올라온 곳이다.
"나머지 절반은 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임도 위로 난 언덕길로 들어선다.
예상했던 대로 가파른 언덕길이 나오고, 구들장처럼 널찍널찍한 바위계단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산이니 결코 만만한 산은 아니다.
부지런히 올라보지만 앞서가는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내려오는 젊은이들을 만난다. 그들로부터 정상 분위기를 전해 듣고, 우리는 아래쪽 이끼계곡의 멋진 모습을 자랑하듯 말해주며 서로의 갈 길을 간다.
이번에는 주목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하고, 얇게 갈라진 바위가 눈에 띈다. 등산로 바닥 돌계단도 그렇고, 유독 송판처럼 널찍한 바위들이 많다.
다리에 힘이 다할 때쯤 정상 삼거리에 이른다. 남은 거리 0.2km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며, 한 숨 돌리고 마지막 힘을 낸다.
등산스틱으로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나가지만,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드는 구간이다.
등산로에서 살짝 벗어난 조망터로 나오니, 나뭇잎 한 장 없는 앙상한 고사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구름이 발아래로 보인다. 이제야 1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에 올랐음을 실감한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고사목 나뭇가지들은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무들은 한겨울 차디찬 북서풍을 이기지 못해, 따뜻한 남쪽을 향해 가지를 뻗게 되었을 것이다.
고사목과 운무 몇 발짝 더 걷고 가리왕산이라 적힌 정상석 앞에 선다. 2시간 50분 만에 1561m를 올랐다. 엄청난 높이의 산답게 사방으로 멀리까지 보인다.
정상 한쪽에 쌓은 돌무더기 외에 특별함은 없지만, 중량급 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조망이 압권이다.
파란 하늘 아래 검푸른 능선이 고래등처럼 사방으로 뻗어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등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은 이 맛에 산에 오르고 또 오른다. 높은 산에 올라보지 못한 자는 산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치와 시원한 산바람 맛을 알지 못하리라....
정상
2021.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