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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 매는 아낙네

칠갑산 산행기

by 하영일
콩밭 매는 아낙네상

칠갑산은 청양을 대표하는 산이다.

청양은 인구가 삼만이 채 안 되지만, 매운 고추의 대명사인 '청양고추' 덕분에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고추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매년 '고추축제'가 열릴 정도로 고추의 고장으로 명성이 높다.


내 고향도 고추농사를 많이 짓던 시골 마을이었다. 직접 고추 모종을 심고 고추 따는 일을 거들었던 터라, 고추농사에 대해 조금 안다.

여름이면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갓 딴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모습이 흔한 식사 풍경이었다.


그 시절 '청양고추'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크기가 작고 뾰족하게 생긴 아주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불렀는데, 아마 지금의 '청양고추' 그것이었던 듯하다. 그때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바로 이 땡초를 두고 생긴 말이라 여겼다.


'땡초'는 너무 매워서 못 먹는 고추 정도로 생각했고, 땡초를 토종고추처럼 된장에 찍어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고추농사를 지었으니, 고추 한 근의 가격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중국산 고추가 들어오기 전이라 그해 날씨와 재배 면적에 따라 고추 가격이 결정되었다.

몇백 원 하던 고추가 때로는 오천 원까지 치솟아, 고추농사로 큰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풋고추를 바로 팔러 나가는 일은 드물었고, 수확한 뒤 바짝 말린 건고추를 시장에 팔았기에, 크기가 작은 땡초는 농사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청양고추'를 더 자주 보게 되었다. 고깃집에 가면 '청양고추' 몇 개와 상추·깻잎이 세트처럼 따라왔기 때문이다.

매운 고추는 먹으면 먹을수록 어느새 매운맛에 대한 중독성이 생기고, 점점 더 매운 것을 찾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양고추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도 이 중독성 때문일 것이다.


케이푸드(K-food)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데도, 청양고추 특유의 담백하고 매운맛이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청양'에서 재배되어 '청양고추'로 불린다고 알고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종묘업체에서 처음 시험 재배를 했던, 청송(靑松)과 영양(英陽)의 앞 글자를 따 '청양고추'가 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양고추' 품종과 이름이 같은 '청양'지역이 주산지가 되었고, 지금은 칠갑산 주변에도 고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른 아침, 콩밭 매는 아낙네 조각상 앞에 선다.

칠갑산에 올 때면 언제나 이 아낙을 제일 먼저 만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이번엔 아낙네 표정이 어둡다.

흰색 페인트가 묻은 것인지, 도색이 벗겨진 것인지 분간이 안 되지만, 마치 백내장이 온 듯 아낙네의 눈이 흉하게 변해 있다.

원래는 무던한 표정에 또렷한 입술을 가진 미인의 모습이었는데, 부쩍 나이 들어 보이고, 호미를 든 손도 병든 사람처럼 거칠어졌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콩밭 매는 아낙네 노래를 흥얼거리며 장곡사 방향으로 향한다. 정상까지 3km 남짓, 반바지 차림에 벼운 등산화를 신었더니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장곡사를 지나고 가파른 등산로가 시작된다.

날이 덥지 않아 다행이지만, 먹을 거라곤 생수 한 통과 사과 반쪽뿐이니 서둘러 다녀와야 한다. 조망이 없는 숲길이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아흔아홉구비' 촬영장소 안내판과 함께 비로소 첫 조망이 열린다.

푸른 녹음 위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을 보며 잠시 땀을 식힌다.


다시 정상을 향해 걷다 보니, 곧 "山"이라 적힌 정상석 앞도착한다.

조망이 뛰어나진 않아도, 겹겹이 이어진 산줄기가 잔잔한 물결처럼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두른다.

먼저 내려간 산객들을 따라잡았지만,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급히 앞질러 간다. 아침을 거른 탓에 산행의 감흥보다 산채비빔밥 생각이 더 간절하다.


다시 장곡사에 이르러,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에 이끌려 하(下) 대웅전 앞으로 발길을 옮긴다. 맞배지붕 대웅전 안쪽에 스님의 뒷모습이 보이고, 염불 소리가 또렷하게 울린다. 국보 두 점과 여러 보물을 간직한 천년고찰이지만, 규모 자체는 크지 않다.

목탁소리를 뒤로하고 나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발걸음은 어느덧 밥집으로 향한다.


아직 점심 먹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한 테이블뿐이다. 딸 셋인 가족인데, 세 딸 모두 비슷한 이미지를 풍겨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산채비빔밥 한 그릇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딸들의 수다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세 딸이 음식 주문부터 의견이 갈리며 시끌벅적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지만, 얼굴엔 행복함이 묻어난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식당을 나오니, 올라올 때 만났던 콩밭 매는 아낙네 조가상을 또 보게 된다. 저 아낙네처럼 머리에 수건 두르고 호미로 밭을 매는 모습은 어릴 적 흔히 보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요즘은 농약을 수시로 뿌려서 그런지, 호미로 밭 매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칠갑산에서도 이제 '콩밭 매는 아낙네'를 찾기 어렵고, 대신 고추 따는 어르신들만 보인다.


'칠갑산'은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는 딸과, 입 하나 덜기 위해 어린 딸을 시집보내야 했던 모녀의 서글픈 이야기가 떠오르는 산이었다. 하지만 콩이 고추로 바뀌면서, 이제는 풍요와 즐거움이 넘치는 산으로 변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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