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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일 Jan 28. 2024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

가리왕산 산행기

동계올림픽 그날의 영광과 함성은 온 데 간데없고, 선수들이 질주하던 슬로프는 잡초 무성한 고랭지 채소밭처럼 변했다. 을씨년스러운 슬로프 분위기와 달리 케이블카는 관광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며 활기가 넘친다.


지난 1년 동안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 18만명이 넘는. TV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에 소개고, 유명 유튜버들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지난 한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장소 중 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리왕산에 이리도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는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음일 것이다.


가리왕산 스키장 건설은 계획 때부터 산림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국내에 올림픽 활강경기를 치를만스키장이 없었고, 활강경기장로서 국제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 가리왕산 뿐이어서 이곳에 스키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면 원상복구를 전제로 건설됐지만, 아름드리나무가 수없이 잘려나가고 산이 생채기 나는 아픔을 겪었다. 가리왕산의 희생 덕분이었는지 평창동계올픽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가리왕산 활강경기

여느 올림픽과 마찬자지로 이곳에서도 새로 떠오르는 스타와 저무는 선가 있었다.

한때 타이거우즈의 여자친구기도 했던 미국의 린지 본 선수는 일찌감치 평창올림픽 홍보대사로 임명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녀는 월드컵에서 통산 81회나 우승했고 스키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으며 "스키 여제"로 불리고 있었다.


들은 그녀가 시속 100km 넘는 엄청난 속도로 가리왕산 설원을 가르는 모습을 기대했고, 그녀 또한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스키 팬들의 관심에서는 조금 어나 있었지만 이번 슈퍼 대회전 경기에 참석한 또 한 명의 선수가 있었다.

는 스노보드가 주종목인 체코의 레데츠카 선수였다.


그녀가 스타트라인에 서자  방송 해설자 선수에 대해 소개를 한다.

"체코 레데츠카 선수로 세계랭킹 4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순위권 진입은 어려워 보인다."라는 설명을 하며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한 평가를 내린다.

린지 본은 이미 메달권에서 멀어고, 오스트리아 아나 바이트 선수가 1위를 마크하며 올림픽 2연패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선수가 경기를 하더라고 메달권 순위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으로 여기는 방송 중계석 분위기였다. 해설자는 시청자와 선수의 입장을 고려한 희망적인 멘트를 조금 보탠다.

"그렇지만 모르죠 열심히 하면 좋은 기록 예상 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후 스타트 총성과 함께 스틱을 힘껏 찍으며 스타트 라인을 박차고 나간다.

레데츠카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속도를 못 이겨 넘어지더라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었고, 밑져봐야 본전이니 죽기 살기로 달려보자. 그런 생각을 가진 듯 초반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그런데  출발한 지 20초가 채 지나기 전에 해설자 멘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출발 전에는 그저 그런 선수로 소개하더니, "턴 하는 것도 좋고요, 앞발 짚는 것도 아주 좋아요...." 동계올림픽에 우리나라 스키 국가대표로 5번이나 출전했던 전문가답게 그녀의 경기력을 금방 알아차리며 칭찬을 하기 시작한다.

"라이도 좋고 타는 것도 괜찮고, 기록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해설자 칭찬을 듣기라도 한 듯 선수는 소리를 질러가며 엄청난 속도로 슬로프를 질주한다.


레데츠카 선수는 이 경기 외에도 본인의 주 종목인 스노보드 경기가 남아 있었다. 그 종목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 그런 이유여서 인지 그녀의 눈앞에는 오직 직진뿐이었다. 넘어지거나 기문을 지나치는 실격 따윈 애초부터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엣지를 걸어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었고, 일직선에 가까운 과감한 질주가 그녀의 작전인 것으로 보였다.


50초가 지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녀의 경기를 지켜보던 중계진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변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고, 선수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마지막 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 몇 초만 더 버티면 좋은 기록을 낼 수도 있다. 피니쉬를 앞두고 마지막 아리랑 점프를 한다.

앗! 그런데 공중으로 치솟은 선수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중심을 잃는 듯 불안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터덕~ 양쪽 스키가 불안하게 슬로프에 떨어진다.

지켜보던 관중들도 순간적으로 실수임을 직감했지만 타고난 균형감각 덕분인지 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피니시 라인을 무사히 통과한다.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피니시 라인을 지나며 관중들의 환호가 터진다.

함성에 놀란 그녀는 전광판을 봤지만, 뭔가 시계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1분 21초. 11을 보여준다  0.01초 차이로 1위에 올랐지만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시간 측정에 뭔가 오류가 있는 것인가. 너무나 의아했고 본인의 기록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꿈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지만, 시계가 고장 난 것도 아니었고, 엄연한 현실이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 세계가 경악했다. 보는 사람도 선수 본인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스노보드 선수가 스키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이다. 스키도 본인 것이 아니라 이번 올림픽에 함께 참가한 친구 미케일라 시프린 선수의 스키를 빌린 것이었다.

며칠 뒤 본인 주종목인 스노보드 경기에서 또 금메달을 따며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스키와 스노보드에서 동시에 메달을 따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날 스키를 빌려줬던 스프린 선수는 린지 본의 기록을 넘어 여자 스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


케이블카가 출발한 지 20분 만에 하봉 정상에 도착한다. 굴로 확 들이치는 냉기에 깜짝 놀라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함에 또 한 번 놀란다.

가리왕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사방으로 연결된 능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민두름한 능선에 촘촘하게 선 나무들은 까까머리에 솟아난 머리털 같고, 계곡을 가득 채운 운무 속에서 신선이라도 나올 것 같다.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뛰어들어 저 앞에 보이는 정상으로 가보고 싶은 호기심 마저 생긴다.


지난여름 장구목이골로 산행할 때는 파란 이끼로 덮인 원시림을 보고 가리왕산이 우리나라 고의 여름 행지로 여겼는데, 지금처럼 두툼한 솜이불 덮어쓴 겨울산으로도 큰 매력이 있다. 가리왕산은 여름도 좋고, 겨울도 좋은 산이다.

가리왕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중봉 능선

돈 만원 들여 한달음에 여기까지 오르고 이만한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남는 장사다. 요즘 말로 "가성비 갑"이라 할 수 있으나, 올해까지만 운행사라질 운명에 놓인 케이블카가 아쉬울 뿐이다.

상고대와 운무
가리왕산 케이블카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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