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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덕이

서운산 산행기

by 하영일

룡마을 주차장은 텅 비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주변 식당들도 인기척이 없다.

어릴 적에 "호랑이를 두 번이나 봤다"고 말씀하시던 느티나무집 할머니네도 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 할머니는 TV에 왔던 일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질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눈에서는 퍼런 불이 번쩍였다."라는 이야기를 실감 나게 잘하셨다.


장작난로 옆에서 뜨끈한 잔치국수 먹으며, 호랑이와 6.25 당시 동네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재미나게 들었 기억이 남아있다.

할머니는 아직 건강하신 걸까. 아니면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까. 오늘따라 할머니 안부가 궁금하고, 그 잔치국수 맛이 그립다. "내려오는 길에 국수 한 그릇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앞을 지나친다.


서운산은 호랑이가 나올만한 첩첩산중은 아니지만 평야지대인 안성에서는 깊은 산골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조선 후기 안성지역 남사당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는 동안 기예를 연마했다.


안성을 대표하는 '안성 남사당패'도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활동했데, 그 시절 안성 남사당패에 전국적인 재주꾼 '바우덕이'가 있었다. 바우덕이는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춤과 노래, 줄타기 등 기예를 연마했다. 그녀는 재주가 출중했고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오늘날로 치면 아이돌 스타 정도 되는 인기 예능인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15살의 나이에 안성 남사당패 최초의 여성 꼭두쇠(우두머리)가 되었고,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기예를 살려 전국 최고의 인기 남사당패로 만들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가 노역자들을 위해 공연을 펼쳤고, 그 공로로 흥선대원군에게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 천한 광대 신분인 그녀가 정 3품 이상 당상관들이 사용하던 옥관자를 받았다는 것은 바우덕이의 재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한다.


아쉽게도 바우덕이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었지만, 안성에서는 '바우덕이축제'가 매년 열리고, 그녀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남아있다.


안성 바우덕이 노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간다

바우덕이 사당

청룡사 앞을 지나 산으로 향하는 포장길이 길게 이어진다. 흙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지만,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개울물 소리 들으며 은적암 방향으로 오른다.


은적암까지는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산길이 이어진다. 언덕길을 30분쯤 올라가니 은적암에 이른다. 태조 왕건이 3년간 은거했다는 곳이다. 몇 해 전 본채 뒤편의 나무가 쓰러져 파손됐던 건물이 헐렸고, 그 자리에 마치 몽골의 게르처럼 생긴 팔각형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이곳을 지날 때면 늘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쉬어 가곤 했다. 뜰 앞 감나무에 홍시가 달린 모습이 기억나는데, 오늘은 감이 보이지 않는다. "까치가 전부 먹어치웠을까. 추위에 저절로 떨어졌을까." 잠시 상상해 보지만, 시기상 홍시가 붙어 있을 때는 한참 지났다. 이미 눈이 몇 차례 내렸으니, 감이 붙어 있을 리 만무하다.


한숨 돌리고 다시 일어선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정상능선에 가까워졌을 무렵 '탕흉대'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면 탕흉대 곧장 오르면 정상이다.


서운산 끝자락에 위치한 탕흉대에 서면 평택과 안성 방면 조망이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다. "탕흉대에 한 번 가 봐야지" 생각만 하고, 되돌아와야 하는 길이 귀찮아 좀처럼 발길이 안 가곤 했다.


잠시 후 헬기장처럼 생긴 널찍한 전망대에 다다른다.

평평한 곳 끝자락에 서니 청룡마을과 저수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뒤편으로 금북정맥이 길게 뻗어있다.

날씨가 풀리면 산행객들이 빙 둘러앉아 도시락 까먹기 좋고, 밤하늘 별과 함께 텐트 속에서 하룻밤 보내기에도 딱 좋아 보인다.

전망대

다시 능선길 따라 몇 발짝 걸으니 왼쪽으로 정상 테크가 보이고, 주변으로 평상들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는 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막걸리 냄새가 진동을 하는 '산 위의 주막촌' 같은 곳이지만, 오늘은 하얀 눈이 평상 위를 뒤덮고 있다.


정상데크에 올라서니, 안성시내가 저 멀리 내려다 보인다. 하늘은 찌뿌둥하지만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 맛이야말로 사람들을 산으로 부르는 마력일 것이다. 오늘은 그 마력에 이끌려 서운산에 올랐다.

서운산 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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