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4
몇 호의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 가족 모두는 그곳이 생소하고 그곳에 풍속까지 잘 알지는 못하여 얼마간은 호젓함을 느끼면서 두문불출을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웃을 나가서 동유들을 사귀곤 하였다. 나는 어떠한 생소한 곳에 가서도 사람들을 금방 사귈 수 있는 체질이다. 이것은 자화자찬이 아니라 사실이다. 일본 땅 조선땅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보았지만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음 해 봄이 돌아왔다. 우리는 조금 남은 돈과 농우를 팔아 장만한 돈으로 논 네 마지기를 더 장만하였다. 그리고 밭을 아홉 마지기를 샀다. 식구에 비하면 아직은 많은 농토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단 한 마지기의 땅도 더 살 여유가 없다. 일 할 사람은 많은데도 일거리가 없어 못할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두 형제는 온 힘을 다하여 그 전답에 퇴비를 듬뿍 넣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전자에 비해 우리 모든 농사가 배나 잘 되었다고 했다. 적은 농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거름을 특별히 많이 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 추수를 한 결과 겨우 우리 식량 할 것 밖에는 안 되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아직 미혼이었다. 그러므로 그 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의 장가를 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추수를 한 뒤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아무런 기술이 없는 나인지라 나는 팔공산 산판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는 건축에 사용하는 재목과 탄광으로 들어가는 받침목 또는 장작을 뽀개는 일이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산판일이지만 그 역시도 손으로 힘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니까 그 산판에서 제일 능숙하다는 사람과 꼭 같은 량을 할 수가 있었다.
한 달이 조금 지나니까 그 추운 겨울철에도 장작 네 평을 뽀갤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산판에서는 제일 큰 일꾼으로 쳐 주었다. 더군다나 그 해는 유달리 눈이 많이 왔다. 그러므로 우리 산판 일꾼들은 오금까지 차는 눈 속에서 작업을 하여야만 하였다. 농촌에서 그런 일이 아니면 꼼짝없이 놀아야만 하는 그 시기이다.
나는 돈을 받는 재미 보다가 동생의 장가를 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바람이 불고 눈이 많이 쌓여 있어도 참고 일을 했다. 겨울철 꼬박 석 달을 하루도 놀지 않고 일을 한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 돈으로 오십 원이 조금 넘게 벌었다. 보통의 농 한상에 이십 원 정도 할 때이니 내가 번 그 돈만으로도 동생의 장가를 들일 수가 있었다. 그때 그 산판이 없었더라면 논이나 밭을 팔지 않고서는 장가를 들일 수가 없었다.
횡제를 한 느낌이 들었다. 금액으로 따진다면 우리 온 식구가 일 년 동안 땀 흘려 지은 농사 보다가 오히려 나은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한 뒤 나는 그다음 해에는 포항항구로 찾아가서 포목장사를 시작하였다.
돈 한 푼 없이 포항으로 내려가서 족숙 양국 아저씨로부터 중상인을 소개받아 외상 장수를 시작한 것이다. 집에는 나 아니더라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는 었었다.
더군다나 그때까지는 무정부 상태로 소위 군정이 주권을 잡고 있을 때인지라 요즘처럼 농촌에 지원대책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객지로 나가게 된 것이다.
내 처도 그해에 첫아들을 낳았다(1948년 7월). 그러므로 한 상념하던 어른들의 걱정도 풀리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 넉넉하게 살지는 못하였지만 작은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