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극 6.25 5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5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우리들은 배가 고픈 김에 취사반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밥을 짓던 사람들도 죄다 떠나고 없다. 해서 우리들은 일선 노무자 생활을 삼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짓궂게 내리던 비도 그날부터 그쳤다. 신령을 벗어나 청통면으로 향하였다. 그곳에 가서 보니 특히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집 식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노무자로 떠날 때에 어른들 말씀이 손에라는 마을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러하였음으로 나는 그리로 갈 수밖에는 없었다. 손에로 가는 길은 좁은 산골길이다. 산골길로 들어섰다. 난생처음으로 가보는 길이다. 그리고 손에라는 마을이 어디쯤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김서방네 집을 찾듯 보이는 사람마다 손에가 어디쯤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모두가 멀리 위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인지라 손에라는 마을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길을 가야만 손에로 가는 길인지 전연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삼갈래 길목에서 잠시 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머님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앉아 있다가 말고 얼른 일어나서 어머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리하여 뜻하지 않게 그 산골에서 어머님을 만났다. 그때 어머님께서는 아들인 나를 전쟁터에 보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그곳까지 나를 마중 나온 셈이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서 어머님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본 어머님께서도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나는 가족들을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찾을 수가 있었다.


손에라고 하는 작은 마을은 빈촌 중에서도 아주 빈촌이었다. 친척이라고 찾아가기는 했으나, 그 댁에는 도박장같이 어둡고 작은 방이 단 두 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식구들은 할머님과 아버님이 방에 들어가서 침식을 할 뿐 그 나머지 다른 식구들은 다들 방앗간에서 혹은 뒤뜰에서 잠을 자야만 하였다. 그런데 하나 문제거리는 소를 먹이는 일이 제일 난처하였다. 음력 팔월 초순 그 당시는 어느 날 할 것 없이 날마다 비가 왔다.


그러므로 남의 동리에 가서 소를 먹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풀을 베러 간데도 어디에 풀이 있는지 또 지게마저 없으니까 소풀을 베어도 집까지 가지고 오기가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피난에 쪼달림보다가 소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만 하였다.


그러기로 십 수일이 흘러갔다. 그때 인민군을 팔공산까지 들어왔다가 별안간 후퇴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미 함대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보급이 완전히 끊어진 관계로 그들은 후퇴가 아니 도망을 치듯하며 며칠 동안에 평안도까지 물러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 것은 우리 국군들과 미군들의 강력한 힘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우리 국민들의 하나같은 승리의 갈망 때문에 하늘의 도움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때 만약 인민군들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갔다면은 그야말로 몰게죽음이 날 수 밖에는 없었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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