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공사기 7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7


이화대학부속병원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갈 때도 없는 거지꼴이 될 뻔하였다. 나는 그 돈을 받아가지고 그다음 날 당장 판잣집을 하나 지었다. 홍제동 이화채석장 바로 앞에 세웠다. 그곳은 개인땅이 아닌 국유지였다.


방 두 개, 부엌 한 칸을 만들었다. 남의 집 툇마루 위에서 살다가 삼일 만에 집이 한 채 생기고 나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서울땅에 내 집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 금방 등천이라도 할 기분이었다. 우리 다섯 식구, 동생 네 식구, 아홉 식구들이 살 집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는 어느 곳을 가서 일을 하여도 저녁나절에는 내 집이 있기에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먹는 것 보다가도 사실 걱정되었던 것은 입이었는데, 그를 해결하고 나니 마음부터가 느긋하다. 그러나 서울 식구가 아홉이나 되다 보니 먹고사는 것도 그다지 만만하지가 않았다.


6.25가 끝난지 불과 몇 년이 남짓하니 우리 정부에서도 모든 일에 갈팡질팡하여 없는 사람들의 실정을 전연 알지 못하였고, 공사마저도 있다가 없다가 불공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하였다.


한동안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회지가 차라리 시골 품삯 보다가 더 쌌다. 내가 살고 있던 집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동생은 그 집을 팔아 야산 일정보를 사서 그 산을 개간을 하였다. 동생으로서는 서울 보다가 그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서울에 남은 나 역시도 식구가 줄어들게 되니 동생과 같이 있을 때 보다가는 한결 삶이 수훨하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일거리가 없어 동분서주할 때도 있다.


국제 토건회사에 있는 김태한씨를 찾아가 보았다. 그때 마침 국제토건에서는 정릉골에 들어가는 중간에 주택공사를 시작할 거라고 태한씨가 말했다. 그 주택 공사 내에는 많은 석축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태한씨에게 그 석축일을 내게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는 고향이 함경북도이다. 그리고 태한씨의 성품은 내성적이면서도 그 천품이 개떡같이 생겨서 말을 걸기가 더러는 난처할 때도 있었다. 말을 해보면 본질을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면서도 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에는 전연 그렇지가 않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렇게 하소. 내가 그러지 않아도 노환씨를 생각하고 있었소. 먼저 학교 공사에서 많은 적자를 보았으니, 그 보충을 해야지. 잘 왔소 그려"하고 첫마디에 그는 좋다는 대답을 하였다.


해서 나는 오래간만에 석축일을 맡게 되었다. 그 당시로 보아서는 단가도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일 때문에 항상 걱정을 하다가 그와 같은 대공사를 맡고 보니 나로서는 그러한 다행히 없었다. 그 일을 맡아놓고 그 즉시로 고향으로 편지를 하여 양친을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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