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공사기 8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8

가족을 합친 뒤 나는 정릉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여 명의 석동과 40여 명의 잡부일꾼들을 모아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국제토건 사장도 이번에는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웃으면서 내게 말을 했다.


나는 사장의 말을 받아 도리어 반발 비슷하게 "내가 할 말입니다. 이번에는 사장님부터 실천을 해 주십시오. 동신 국민학교 때문에 나는 일 년 동안 그 빚을 값느라고 허리를 펼 겨를이 없었답니다"하였다.


내가 그러지 않아도 김태한씨의 편으로 그 사실은 사장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들은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30여 채의 주택이 들어앉을 정지공사에는 석축일이 주공사라고도할 수 있다. 그리고, 위치와 조건도 매우 높은 편에 속하였다. 나는 신이 났다. 많은 석공들도 나무랄 데 없이 다들 일을 잘해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돈암동 국민학교 앞에 일거리가 있다고 한 노인이 찾아왔다. 그 노인은 복덕방을 하는 노인이었다. 그분의 말을 듣고 돈암동을 가 보았다. 그것 역시도 주택공사이다. 그리고 그 공사는 바로 그 노인장의 개인의 일이었다. 당신이 집을 지을라고 석축을 하겠다는 공사이다. 그러므로 일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니 그 석축 공사는 조금은 난공사라고도 할 수가 있다. 축대 높이가 약 6미터, 그리고 거기다가 바로 앞에는 개인주택이 바싹 달라붙어져 있어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에도 많은 지장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달갑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매우 높은 단가를 불렀다. 그런데, 그 노인은 일만 잘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노인장과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김경식이었다.


이렇게 계약을 하고 나서 그다음 날부터 일군들을 보내어 석축일을 시켰다. 석공이 워낙 많다가 보니 양쪽에 나누어 일을 해도 일손은 넉넉하다. 7, 8일간을 일을 했다. 여름철인지라 장마가 들었다. 음력으로 오월 스무 이틑날 그날은 나의 증조 할머님의 입재일이다. 그래서 그날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별안간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백 밀리도 넘게 큰비가 쏟아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이 되어갈 무렵 우리 문 앞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는 비가 조금 그치고 있었다.


우리 문 앞에는 형사들이 두 사람 서있다. 왜인가는 몰라도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누구십니까? 어떻게 저를 찾아왔습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성북경찰서에서 왔다고 하면서 나를 곧바로 지프차에 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증조 할머님의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그 차를 타고 그들과 같이 떠났다.


성북경찰서를 가면서 나는 형사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봐요, 당신 큰일 났소. 당신이 돈암동 학교 앞에서 하던 공사가 이번 비에 붕괴되었다오. 그 축대가 붕괴되는 통에 그 밑에 있는 집이 그 축대에 깔려 두 사람이 죽었소"하고 형사들은 그제야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성북경찰서에 도착하였다. 벌써 거기에는 건축 주인 김경식이라는 노인도 와 있다. 그제야 형사들의 말을 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경식 노인께서도 형사들이 하는 말처럼 밑에 있던 집이 폭삭 망가졌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현장으로 나가보았다. 사실이다. 그런데, 그 석축이 무너질 이유가 있었다. 돈암동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날 밤에 모래를 한차 실어다가 막아 그 또랑을 꽉 막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물이 석축이 다들 밀려가서 그 모양이 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사람이 두 사람이나 죽었으니 누가 잘잘못을 했든 간에 문초가 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것은 분명 건축주가 잘못해서 빚어진 일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석축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도 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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