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공사기 10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10


며칠간 일을 하여 쌀값을 다 갚았다. 바로 그때였다. 박일동씨가 있는 신광회사에 일거리가 있었다. 모두가 석축공사인데, 여간 많지가 않았다. 장소는 이화동 이승만 박사의 본가 바로 뒤이다.


그 현장 소장은 장교흥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분은 나와 같은 경상북도 사람이다. 수백 평의 많은 석축을 도급을 받았으니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광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사장 이하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을 놓고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돈을 받아 낼 걱정도 없다. 그 공사는 영단주택공사에서 감독을 하였다. 그러므로 감독관은 영단주택에서 나와 일을 보았다. 그 감독의 성은 강씨였다. 그는 여간 따지지가 않다. 작은 일에까지도 꼭 꼭 간섭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돈암동 일을 생각하면 강씨의 하는 일이 나에게는 전화위복이 될는지도 모른다. 해서 나는 그의 말을 언제나 달갑게 받아들였다. 무조건 예예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실천에 옮겨갔다.


얼마가지 않아 그와도 나는 친하게 되었다. 석공들은 10여 명이나 되었다. 얼른 계산해도 내게 돌아오는 몫이 많다. 큰돈은 몰라도 작은 집 한 채 지을 값은 남을 듯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돈암동의 파괴된 집주인 육군 대령이 미국에 있다가 그의 처가 죽는 바람에 귀향을 하여 김경식 노인과 나를 다시 고발을 하여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해서 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지긋지긋한 형무소 감방이 눈에 떠올라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신광회사 사장 유원준씨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사장 유원준씨는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네, 내가 변호사를 댈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게나"하였다.


사장의 말을 들은 나는 다소나마 안심은 되나 육군 대령인 작자가 우리들에게 기어코 보복을 할 작정으로 재심을 걸어왔으니 먹고살기가 바쁜 나로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재판일이 되었다. 유원준 사장이 보낸 변호사는 대한민국 법률협회 회장이요, 변호사회장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일 무슨 회의의 대표자라고도 하였다.


대한민국 내 변호사 중 최고 우두머리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는 유원준 사장과 대학 동창생이면서도 누구보다가도 절친한 친구라고 하였다. 재판하는 날에 이천상 변호사가 나타났다. 그는 거친 얼굴에 몸매가 조금 뚱뚱한 편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외모로서는 순 농사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날 재판날 나에 대한 변론을 하는데도 말이 청산유수가 아니라 뚜벅이처럼 뜨문뜨문하였다. 내가 보아도 속이 터질 만큼 답답하였다.


그의 거동을 본 나는 또다시 형무소로 들어가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재판이 끝이 난 뒤 판사는 전과 똑같이 내게 집행유예를 내렸다. 이렇게 쉽게 단번에 해결이 된 것은 이천상씨의 덕분이기도 하고 신광회사 사장님의 덕택이다. 그때 시절에 육군 대령이라면 그 기세가 승천이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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