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공사기 12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12


이때 나는 영등포에서 김포 비행장까지의 도로확장공사에서 석축일을 도급했다. 이십 리 가까운 거대한 공사이다. 그 공사에서는 많은 석공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큰 것만큼 돈벌이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큰 공사장에서 도급자라는 명칭만 하여도 나로서는 보람이 있는 일이다.


두 달 남짓 되어 공사는 끝이 났다. 그 공사가 끝이 난 즉시 신광회사는 다시 봉일천 다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 공사에 소장되는 사람은 박일동씨였다. 일동씨라는 사람은 우리 순천 박씨의 한 자손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에게 족속이 되고 나는 그분에게 족질이다. 해서 나는 그분에게 언제나 아저씨라고 불러왔다.


그분이 현장 소장이라고 해서 내가 아부를 한 것은 아니다. 영암선 7공구 때부터 나는 그분을 항상 족숙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므로 그분과 나 사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봉일천 다리공사에 석축일만 하여도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회사에 이익 한 푼도 없이 전액 그대로 내게 줄리가 없다. 한 달 남짓 일을 해서 62만 원이라는 거액을 벌었다. 그때 돈 62만 원이라면 어지간한 집 한 채를 살 수가 있다. 그 돈을 아버님께 가져다 드리니 아버님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님 한평생에도 그러한 거액을 처음 만져보는 모양이다. 그 돈으로 시골에 가서 땅을 사면 50마지기는 너끈히 살 수가 있다. 아버님은 그 돈을 가지고 시골 고향에 내려가서 땅을 사고 싶은 모양이다.


어머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것이 아버님의 소원이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 신령 치산골에 하천 부지 3만 평이 났다고 하였다. 그러한 소식은 동생의 편지 내용에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만 평도 많은데 3만 평이라고 하면 논 이백 마지기의 편수이다. 동생의 편지를 보니 나 역시도 은근히 그 땅이 탐이 났다. 그래서 나도 아버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3만 평의 금액은 80만 원이라고 하였다.


그때 돈 80만 원이면 지금 돈 1억도 넘는다. 그러나 그 땅값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그 땅을 개간을 하자면 그 외에도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살고 있는 집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님의 소원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날을 생각하지 않고 그 치산 강변땅을 샀다. 그리고 개간할 돈까지도 아버님께 드렸다. 평지의 땅 그것도 한 필지의 땅이다.


이 세상에서 한 필지의 땅을 이백마지기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나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부푼 꿈이다. 그 땅을 사서 어른들이 고향으로 내려간 위 우리는 남의 셋방살이를 하였다. 그러다가 조금 뒤 한 칸짜리 집을 하나 사서 두 칸짜리를 만들었다.


그 위치는 홍은동 포방터라고 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대게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다. 몇 개월 후 나는 다른 곳에 일을 하여 약간의 돈을 벌었다. 그래서 나는 포방터에 집을 팔고 박석고개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 가서부터는 어쩐지 일거리 흔하지를 않았다.


집 만 6칸짜리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 끼니조차도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향에 땅을 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가 있을 텐데, 동생의 말에 속아 우리는 별안간 거지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를 하여도 소용이 없다. 6칸짜리 집을 짓는데도, 남의 돈을 조금 빌려 지었으니 아들 인규의 중학 들어가는 입학금 마련도 할 길이 없다.


바로 그때였다. 신설동 김태한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원도 임계라는 곳에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리 공사를 한 뒤 양쪽 소래를 쌓는 석축일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일본말로 이르면 우인구라고 한다. 우인구란 원래 일거리가 많지 않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김태한씨와 같이 임계를 간다고 약속을 했다. 임계라는 곳은 대관령을 넘어 삽짝령을 넘어가서 자리하고 있는 그야말로 하늘 밑 첫 동리이다. 임계 그곳이 곧 한강 오백 리에 첫 시발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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