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16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네들은 보또랑(수로)이 들판보다가 깊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하지만 나는 노인네들의 얘기를 들은 척도 아니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작은 하천이라서 자갈 모래가 아주 귀하다. 해서 나는 그 마을 부인들에게 자갈을 손으로 주워 모으고, 또 몇 명은 큰 돌 사이사이에 있는 모래를 채취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목수 한 명을 구하여 수문을 만들었다. 그 사람은 산골에서 초가집이나 짓던 사람인지라 도면을 볼 줄은 조금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콘크리트 하는데 돌봐야 하고, 석축을 쌓는데도 돌봐야 하고, 자갈, 모래 만든 데는 그 크기가 적당하도록 시켜야 하며, 가다와꾸(콘크리트를 다져 넣어 모양을 만들기 위한 틀) 만드는데도 계속 신경을 써야만 하였다.
그런데 매일 인부들 이름 적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 마을에 동장이 나와서 노는 사람들을 감독하였다. 그때 인부들 이름을 적고 품계산하는 그 사람은 정선군 정서기 이씨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나와 아주 절친하였다. 매일 같이 한 방에 잘 때도 있고, 혹 더러는 자기네 집에 갔다가 올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댁 밥주인 아줌마가 나를 자꾸 자기 방으로 놀러 오라고 하였다. 해서 나는 무슨 음식이 있나 하고 가서 보니 먹을 것이라는 아무것도 없고 이불만 방바닥에 깔려 있다.
그 당시에 그 여인의 나이가 사십여 세였다. 나와 나이가 거의 같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언제나 나만 보면 방긋 웃곤 하였다. 그런지 십여 일이 못되어 그 여인을 만났다.
밤 열두 시 전에 그 방에 들어가니 요와 이부자리가 내가 장가갈 때 보다가 훨씬 낫게 바닥에 깔려있었다. 해서 우리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도 신방을 차리게 되었다. 그 여인은 십육 년 만에 나를 처음으로 상대한다고 하였다. 왜인고 하면 그 마을이 사십여 호가 되는데, 전부가 다 집안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세월을 아이들 셋을 데리고 혼자 고생을 한 모양인 듯하였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알고부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그 마을 동장이 먼저 알고 그 여인에게 "아줌마 내 술 한 잔 드시요. 박소장 같은 분은 이 천지에 둘도 없는 양반입니다." 하면서 "박소장님, 여기 공사를 마칠 때까지는 우리 아줌마를 꼭 부탁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살고는 있어도 참으로 가엾은 사람이라 생각되니까요." 하면서 단 세 사람이 앉아서 웃으면서 얘기를 하였다.
그 마을 동장은 나이가 나보다가도 5살이나 더 먹었다. 그러함으로 우스개 말을 하여도 아주 점잖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구장에게 말을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화장실을 만들라고 시멘트 다섯 포를 거저 주었다. 그 공사장에 나온 시멘트가 백포가 되는데, 열 포, 스무 포 더 써 보아도 그 시멘트 무더기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그 여인은 내 마음대로 알게 되었다. 내 밑에서 일을 보는 두 사람도 저녁만 되면 소장님 우리 인부들과 같이 화투를 할 참이니 저쪽 방에 있다가 놀다가 오라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놀러 가면 그 아줌마는 대번에 희색이 만연하여지면서 "이 동리 사람이 다 집안이라 하여도 그들에게 내가 덕을 본 것이 전연 없소. 내가 지금 어느 곳으로 살러 간다고 하여도 내게 대해 말할 놈은 아무도 없소. 그리고 내가 여기서 술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이것도 인연인지는 몰라도 박소장님을 보고 나니 왜인가 내 마음이 자꾸만 그쪽으로 끌려가요. 해서는 나는 가까운 이십 년 만에 당신께 맡겼습니다"하고 말을 하였다.
그에다가 딸 농사짓는 것을 보면 참으로 허송세월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매일 같이 개를 잡아먹으니 돈도 아주 헤프게 써진다.
그리고 그 공사를 하던 중간에 5.16 혁명이 일어났다.
그렇게 되고 보니 마음이 대번에 이상해진다. 그러나 라디오를 듣고 보니 이미 시작한 일은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혁명이 일어나도 돈은 분명하게 줄 것만 같다. 그런데 일을 끝마치고 나니 품삯은 돈이 아니고 밀가루와 광목 그런 것뿐이다. 그렇게 되니 그것을 가지고 올 수도 없고, 그곳에서 팔자니까 삼분의 일 값도 받지는 못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윤보선씨 시대에 시작하여 박정희 시대에 일을 마쳤으니, 그것이 돈이 될 턱이 없다. 해서 밀가루 판돈 몇 푼과 광목 일곱필을 타서 다섯필은 그곳에서 반값도 못되게 팔고 두 필은 억지로 기차에 싣고 왔다.
그곳에 가서는 여인만 하나 알게 되었을 뿐 돈을 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오기가 바쁘게 영등포 염천교에서 김포 비행장까지 도로확장공사가 있었다. 그런데, 산허리를 잘라서 확장하기 때문에 그 공사석축은 전부가 "가라스미"였다. 일류석공이라야 일을 할 수가 있다. (카라즈리 (空積み / から積み): 모르타르나 콘크리트 없이 돌을 쌓는 방식, 즉 메쌓기를 의미합니다. 돌과 돌 사이에 흙이나 잔돌로 채워 넣는 방식이죠.)
그러므로 서울에서 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칠팔 명 구하였다. 그런 뒤에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은 순조롭게 잘 되어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광건설에서 윤 부장이 마포 도화동 밑에 있는 평지에서 아파트를 십여동 짓는다고 하면서 그 평지에 "개스이" 또랑이 많으니 그곳의 석축도 내게 부탁을 한다.
영등포의 일만 하여도 복잡한데, 그 일까지 내게 부탁을 하니 정말로 큰일이다. 해서 나는 십장 삼아 정선군에 있던 이씨를 불러올렸다. 그리고 그는 마포 현장으로 보냈다. 돌을 싣도 오면 어디에 받고, 모래는 어디, 시멘트는 돌편당 몇 포 또 돌이 잘 쌓아지나 그렇지 않은가를 잘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선 이씨는 학식에 대하여는 남에게 밑질 사람이 아닌데도 토목공사일에 대해서는 아주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삼일 째 되던 날 정선 이씨는 마포공사장에서 일군들한테 투방을 맞고 낮에 집으로 돌아왔다.
해서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비를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런 뒤에 나는 마포일을 할 수가 없어 내가 잘 아는 석공 김영업씨와 김경묵씨에게 마포일을 책임지고 하라고 넘겨주고, 나는 김포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큰 공사를 하다가 보니 많은 석공들이 사람의 속을 썩인다. 그중에서도 미아리에 사는 강모씨가 종종 회사에 시멘트를 팔아먹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