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의 중장년기 1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1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이 내가 항상 꿈을 꾸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심으로 흐뭇하였다. 3만 평이 한 군데 평평하게 펼쳐져 있으니 그 땅을 보기만 하여도 배가 부른 듯하였다. 정말로 물건다웠다.


지광이 얼마나 넓은지 그 끝이 아스레히 보인다. 논을 만들면 일백오십 마지기요, 밭으로 계산하면 삼백 마지기가 된다. 그러나 내가 그 땅을 살 때는 논도 밭도 아닌 과수원을 만들어 한국에서 제일 큰 과수원을 만들려고 하였다.


사과나무를 심어 십 년이 넘으면 우리는 거부가 될 수가 있다. 한평생 놀고먹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일 년도 다 못되어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신 아버님은 빈손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셨다. 왜냐하면 내 동생이 영천군 국회에 출마한 조모씨의 돈을 대어주느라고 그 땅을 내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팔아서 죄다 써버렸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참인 줄만 알고 있었더니 노름을 하여 반을 잃고 그 나머지 돈은 술과 계집에게 다 써버렸단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도 저도 모르고 올라오셨다. 그 땅을 다시 팔아서 동생이 다 써버리도록 아버님은 무엇을 하셨는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기왕에 없어진 돈 내가 말을 하면 아버님의 심사는 더욱 난처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남의 집 셋방에 사는데 아버님이 올라오셨으니, 침실이 없어 큰 문제다. 해서 나는 남의 돈을 조금 차용하여 방한칸 부엌 한 칸 있는 흙벽돌집을 하나 샀다. 그런 다음 또 흙벽돌로 방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런데 온돌이 잘못되어 방 두 개가 다 얼음장처럼 차다.


그런 데다가 내 처는 다섯째 아이를 하나 낳았다. 넷째 여식이 어려서 일찍 세상을 뜬 관계로 그 아이는 실질적으로 넷째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처는 산후병에 걸리어 온몸이 다 아프다고 하였다. 하지만 탄을 아무리 때어도 방은 조금도 따습지 않았다. 그래서 두 방 사이에 있는 벽을 뜯고 함석으로 만든 연탄난로를 하나 놓았다. 그러나 그저 조금 나을 뿐이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참으로 한심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그래서 봄이 온 즉시 나는 그 집을 팔아서 박석고개의 한 부잣집 땅 57평을 샀다. 그런 다음 나는 일을 하러 다니고 인부 둘을 사서 벽돌을 찍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재수가 없는 관계로 두 인부가 찍은 벽돌이 하나 없이 전부 다 깨어졌다. 그렇게 되다가 보니 나는 두 인부의 품삯만 손해 보았다.


해서 나는 내 손으로 그 집을 지을라고 또 남의 돈을 내어 블록으로 담을 쌓았다. 그래서 집은 아주 큰 집을 지었다. 담을 쌓는데도 죄다 우리 집 식구가 일을 하니 집을 짓는데도 재료값밖에는 들지를 않았다. 그리고 지붕 위에 서까래도 전부 다 헌 재목을 사서 했기에 그다지 많은 돈은 들지 않았다. 제일 돈이 많이 드는 것은 기와 이는 것과 문이다.


그리고 대청마루는 헌 후루링(나무판자)을 사서 빼빠(사포)로 닦은 다음 니스칠을 해 놓으니 대청마루가 아주 훌륭하였다. 사람들이 와서 보고 집을 참 잘 지었다고 하였다. 그때는 아버님도 기분이 좋아서 기뻐하셨다.


그 집을 다 짓고 나니 족숙 박일동씨가 집을 하나 지어야 하는데 돈이 적어서 못한다고 하였다. 그분의 말을 듣고 그 만한 돈이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대모도는 집 사람들이 다 하고 재료만 사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일동씨는 그렇다면 한 번 시작해 보자 하고 나만 믿고 이층 집을 시작하였다.


집터는 아주 단단하였다. 땅바닥을 조금만 파서 암석이 나오니 기초 콘크리트도 그다지 두텁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단층을 다 짓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2층 반쯤 올라갈 때 우리 아버님이 우연 득병하여 별세를 하시었다.